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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노트

[RECORDERS – 삼형제, 끈을 다시 엮다.]

by 글쟁이~♥ 2022. 2. 25.

0.프롤로그

 

-한 남자-

 

깜깜한 공간, 발가벗은 한 남자가 온몸을 바르르 떨며 눈을 떴다. 그의 육체는 실오라기 하나 없이 공중에 떠다니는 중이었다.

여긴 어디야? 무슨 일이지, 이게?...

맞아, 준성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혜리하고 나머지 우리 애들은, 어떻게 됐을까? 같이 숲을 헤맸던 거 같은데...

그놈의 술, 술집 여자 때문에, 걘 도대체 뭐였...

으아아악!

찬찬히 기억을 더듬으려던 그는 갑자기 비명을 질러댔고, 순간 그의 눈에선 붉은빛이 번쩍였다. 방금 막 생각해내던 기억들이 온갖 신경을 건드려가며 그의 뇌리를 스쳐 빠져나갔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미안해, 얘들아, 여보, 혜리야...

남자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그 붉은빛은 그에게서 모두 빠져나와 사라졌고, 탁한 눈만이 남았다. 이내 남자는 다시 정신을 잃었고, 그의 몸뚱이는 여전히 둥둥 떠다니는 신세였다.

 

띠링! ! !

얼마가 지났을까?

공간 저 멀리에서 황금빛을 띄는 점 셋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점점 빛줄기를 그으며 그 몸뚱이 쪽으로 다가갔다.

 

-숲 속, 도망치는 삼형제-

 

한 여자가 어린 남자아이 셋이 보는 앞에서 한 남자의 다리를 힘껏 붙들었다.

여보, 이제 그만요! 제발! 저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래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

다리에 붙은 여자의 애절한 호소는 남자의 안중엔 들어오지 못했다. 붉은 빛이 감도는 그의 눈은 한 아이에게로 향했다. 여자를 뿌리치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제일 나이어린 아이를 노려볼 뿐이었다. 참으로 몸집이 작고 다리와 팔 한쪽이 불편한 아이였다.

준서야, 준상아, 어서 막내 데리고 도망가! 어서!”

여자는 얼마 남지 않은 힘으로 남자를 붙든 채 소리쳤다.

계속 뛰어! 멈추지 말고!”

여자는 계속해서 소리치며 흐느꼈다.

 

혼잡한 도시를 벗어나 한참을 달리다보면 울창한 숲이 펼쳐져있다. 그 숲 가까이엔 푸르른 바다가 인접해있기도 하다. 그 울창한 숲 한 가운데에는 집 한 채가 숲을 울타리삼아 숨어있다. 한번 보면 누구나,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버킷리스트에 추가시킬 만한 자연경관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 밤, 보름달이 내려다보던 그 숲은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그 집 앞에 쓰러져 흐느끼는 여자의 절규소리가 온 숲을 휘감았기 때문이었다. 그 절규를 발판삼아 삼형제로 보이는 아이들은 온갖 넝쿨을 헤치며 무언가로부터 계속해서 도망쳤다. 제일 덩치가 큰 아이가 몸이 불편한 막내를 안고 뛰느라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아이들의 얼굴을 감싸는 끈적끈적한 거미줄구석 길쭉하게 걸터앉은 거미라던가 슥, 스윽 다리를 훑거나 밟히는 능글능글한 뱀 따위들은 그들의 공포요소들이 되지 못했다. 오로지 공포의 대상은 딱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쫓아오는, 채찍을 든 남자였다. 그는 어느새 아이들 뒤를 바짝 쫓았다.

 

1.길동

 

오늘처럼 달이 유난히도 크고 꽉 차올랐던 밤이라 기억된다. 어린 내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잔뜩 수그려있고, 내 등 위로 누군가가 날 감쌌다. 또 그 위를 널찍한 덩치로 두 팔 벌려 날카로운 무언가로부터 보호하던 누군가가 있었다.

~! ! ~! !

기분 나쁜 소리가 쉴 틈 없이 계속 이어졌다.

도망가! 둘이 먼저, 어서!”

한 목소리가 거친 숨소리와 맞물려 귓가에 들려왔다. 다음 순간 내 몸은 일으켜 세워졌고 어떠한 손에 이끌려서 달리게 되었다. 날 감싸던 이가 내 팔을 붙잡고 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던 것 같다. 분명 거기까지는 희미하게나마 기억이 난다. 그 뒤로 어떻게 도적 홍길동 형님 곁으로 가게 된 건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곳은 어디였고, 형제인가 생각되는 형체 흐린 그 둘은 누구이며, 심지어 내 이름까지도! 무엇하나 확실하게 떠오르는 게 없어 답답할 따름이다. 지금의 이름은 날 아우로 삼아준 길동형님이 돌아가시기 전, 자신의 도깨비무공과 함께 물려준 것이다. 그 이해할 수 없는 유언과 함께...

 

가끔 그날 밤이 떠오를 때면, 내 왼쪽 팔이 덜덜덜 떨리다가 멈춘다.

여기서 뭐해?”

앞마당 마루에서 멍하니 보름달을 보던 내게, 초희가 다가와 떨리는 내 왼팔을 지그시 잡아주었다.

또 그때 그 생각해?”

초희의 물음에 난 고개만 끄덕였다.

언젠간, 기억이 돌아올 거야, 그 사람들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고. 달님이 저렇게 굳건히 자리를 지켜주고 계시니까, 그렇지 않겠어? ? ?”

초희는 울상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을 풀어주고자 했다. 보드라운 볼을 빵빵하게 하여 내 얼굴에 들이밀며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 ? 그렇소? 안 그렇소? 길동씨! 대답 좀 해보시지?”

야아~ 그만해애~”

초희 덕에 이번에도 난 깔깔깔 크게 한번 웃으며 그 우울한 생각에서 벗어나올 수 있었다.

, 나도 알고 싶네! 울 서방님의 진짜 이름을 말이야! 분명 멋진 이름일 거야! , 지금이름도 좋긴 하지만!”

초희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춤을 추듯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과연, 그녀 말대로 그럴까?’

내 입가와 눈가엔 다시 씁쓸함이 묻어나오려 하고 있었나보다. 그 틈도 주지 않으려는 듯 초희는 내 귓불을 마구 잡아당겼다.

, , 거 쓰잘데기없는 걱정하신다. ! 서방님 진짜 못쓰겠네? 그때 우리 집 매화나무아래에서부터 알아봤다니까! 밥이나 먹으러 가소!”

난 귀를 부여잡고 초희 뒤를 쫒으며 아프다고 투덜댔다. 그러나 좀 전의 씁쓸함은 이미 행복으로 바뀌어있었다. 내 입꼬리는 이미 귀 가까이 올라가 내려올 줄 몰랐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초희! 내 옆에 그녀가 없었다면 난 벌써 어둠에 침식당해 먼지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초희는, 나에겐 햇살과도 같은 그런 존재인 것이다.

 

*

 

그 봄날의 햇살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다. 매화나무 밑에 쓰러져 있던 내 눈에 햇살이 들어왔었다. 그 햇살 속에서 작고 어여쁜 한 어린낭자가 수면위로 떠오르듯 찡그리고 있던 내 시야에 드러났다. 그 낭자의 얼굴은 봄날 오후의 햇살보다 눈부셨고 하얗고 하얗게 부드러워 보였다.

이보시오, 괜찮소? 이봐요, 정신이 들어요?”

여긴 어디지? , 목소리가 곱구나, 난 천국에 온 게 아닐까?

영실대감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고, 난 천국에 온 게 분명해. 목소리에 어울릴만한, 예쁘장한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곱다, 고와!

난 좀처럼 얼이 빠진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내 눈은 점차 풀려갔고, 내 입술을 담은 턱은 저 앞에 보이는 고운 얼굴 가까이 전진해갔다. 황홀감에 눈이 반쯤 감겼을 때였다.

번쩍!

번개가 쳤다.

영실 대감님이 날 데리러 천국까지 왔나? 아니 왜?

그것치곤 내 뺨이 너무 아팠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는 걸 겨우 참았다.

뭔 손이 그리 맵소!”

정신을 차린 난 축축한 두 눈을 하고선, 뺨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울먹이며 따졌다. 햇살 속에서 떠오른 그 낭자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어보이곤 말했다.

헌데 그쪽은, 멀쩡하신 도령께서 무슨 연유로 남의 집 마당에 이렇게 넋을 놓고 누워 계신지요? 것도 벌건 대낮에!”

그 낭자는 인상을 팍 쓰며 말을 이었다. 주위에 알리기 전에 알아서 나가라며 팔을 멀리 담장을 향해 폈다. 그 목소리는 침착하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뭔가 근엄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 목소리에 내 몸은 절로 뛰어가서 담을 넘었다.

내가 왜 순순히 따르고 있지?’ 라는 생각이 스치면서도 내 몸은 그 낭자의 명령에 너무도 순종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지!

담벼락 너머로 가서도 몰래 낭자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무언가에 끌리듯, 내 시선은 그 낭자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아 웃겨~ 뛰어가는 저 꼴을 보라지...”

그 낭자는 해맑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매화나무 곁에서 아직 떠나지 않았다.

아씨! 초희아씨! 대감마님께서 찾으셔요, 이제 서둘러 들어가셔야 해요.”

그 낭자의 몸종이 애타게 부르며 쫒아왔다. 초희는 약간 두리번거리더니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름이 초희로구나! 얼굴처럼 이름에서도 꽃향기가 나는구나!’

그때도 내입꼬리는 절로 올라갔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날 데리러 영실대감이 왔고, 나도 서둘러 발길을 돌렸었다. 그것이 초희와의 짧았던 첫 만남이었다. 그 뒤로 영실대감의 시간이동 실험이 성공한 덕에, 난 그곳을 몇 번이고 다시 갈 수 있었다. 균이라는 초희 남동생과도 알게 되어 내 모험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무척 즐거워해서 나도 이야기할 맛이 났었다. 그리고 초희의 남편이 될 사람 염탐 하는 등 많은 일들도 같이 했었다. 그 후로 초희는 시댁으로부터의 온갖 구박과 병마로 불행하고도 짧은 생을 살아야했다. 그 시대의 사람이 아닌 나는 그녀를 지켜주진 못했다. 그 삶이 마감되는 순간, 고맙게도 그녀는 나의 아내가 되어주었다.

 

*

 

균아~ 균이야~ 이 누이를 용서하렴, 먼저 떠나와서 미안해.”

잠든 초희는 종종 그 시대에 남은 하나뿐인 동생 걱정으로 자그마한 목소리로 지금처럼 잠꼬대를 하곤 한다.

걱정 마, 내가 가끔 가서 봐주고 있으니.”

그러면 난 잠든 초희 얼굴을 보며 이렇게 속삭이곤 했다. 아직은 극히 제한적인 사람들만의 시간이동술이기에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어제도 시간을 내어 초희, 허난설헌의 동생, 교산 허균의 시대를 다녀왔다.

 

*

 

그 시대의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으며 별들이 촘촘하게 빛을 뽐내고 있었다. 동틀 녘까진 아직 여유로운 밤, 약속이라도 된 듯, 밤보다 어두운 검은 구름들이 삽시간에 몰려들었다. 그 구름들은 어느 앙상한 초가집 위로 몰려가더니 번개를 내리쳤다.

콰광쾅쾅!

번개는 요란하게 한번 울었다. 그리곤 다시 구름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흩어졌다. 그렇게 번개가 데려다 준 나는 도착하자마자 그 초가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교산, 어찌 이리 되었단 말이오!”

나는 탄식하며 집 안에 홀로 초라하게 누워있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역시 그대셨군, 번개가 요란하게 울리니 홍길동, 그대가 올 줄 알았지... 잘 지내셨소?”

노인은 기침을 연신 해가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 난설헌 누이는 잘 지내시오? 그대는 젊을 적, 아니 어릴 적 봤던 모습 그대로구려, 하긴 그렇겠지, 누이도 그렇겠죠? 불쌍했던 누이, 누이는 이젠 잘 지내시오?”

나는 대답했다.

초희는 잘 지냅니다.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시와 노래를 불러주며 주위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요. 대감을 많이 그리워한답니다. 그래서 제가 전하께 허락을 받고 대감을 모시러 왔소!”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난설헌 누이를 다시 뵙고 싶소! 허나, 이 몸이 지금 갑자기 사라진다면, 이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을 것이오! 광해가 가만두질 않을 테니... 안타깝지만 누이에겐 이 아우는 잘 있다고 전해만 주시오! ~ 오랜만에 오셨으니, 그대의 이야기나 또 들려주시오, 어릴 적 그때처럼...”

저도 아주 어렵게 부탁해서 온 것인데, 하는 수 없지요!”

그러곤 난 잠시 생각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제가 아직 개똥이라 불리던 시절의 이야기를 잠깐 해 드리리다. 그날은 달도 구름에 숨은, 아주 깜깜한 밤이었지요.”

 

**

 

그날은 달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이었다.

형님, 괜찮소? 정말 괜찮은 거요?”

나는 만신창이가 된 형님을 업고서 숲길을 걷고 있었다.

개똥아, 힘들지? 못난 형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다.”

형님은 거친 숨소리로 이 지경이 되어서도 내 걱정을 하는지, 계속 이 말만 되풀이했다.

그만 좀 하소! 지금 형님이 내 걱정 할 처지요?”

누군가 내 목을 죄는 듯하고 눈물이 계속 쏟아질 것만 같아 나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형님은 연산인가 뭔가 하는 악덕한 임금에게 맞서 폭동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오는 길이었다. 풀려났다기보다 오물을 버리듯, 관군들이 형님을 근처 숲에 내동댕이친 것이다. 하늘도 내 눈물을 따라하나 싶었다.

우둑, , 우두둑, 우두두두두둑, , 쓰아아아아아.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는가 싶더니, 금방 장대비가 되었다. 비는 거센 바람과 함께 우리 둘을 적시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초조하게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아 달렸다.

형님, 조금만 참으셔요, 근방에 동굴이라도 보이면 바로 들어 갈 테니.”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저만치 커다란 석판이 하나 보였다. 그 석판 주위로 신기하게도 비바람이 닿지 않는 땅이 보였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그곳은 낮의 따스한 햇볕이 내려와 밤이 되서도 계속 머무르는 듯 환해 보이기까지 했다. 좀 이상했지만, 비바람 속에 있는 것보단 나을 거란 생각에 주저 없이 그곳으로 가 형님을 눕혔다.

 

형님 괜찮소?”

나는 형님얼굴을 살폈다.

아직, 난 괜찮, 찮다 이눔아.”

형님의 말과는 다르게 숨소리는 더욱 거세졌고 기침도 늘어난 모양이었다.

개똥아, 개똥아? 우리 개똥이~ 어쩜 이리도 나와 똑같이 생겼느냐 허허... 어쨌든 이젠, 내 이름과 이 도깨비 무공을 네게 물려줄 때인 게로구나. 우리 착한아이, 개똥이. 이제 내 이름 길동을 네가 이어줬으면 좋겠구나! 이건 두목이 아닌, 형으로서의 부탁이니라. 이 이름과 힘을 가지고 나를 이어 약자편의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좋겠구나. 내 이름은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뜻이지만 너는 아이란 뜻의 동을 써서 길한 아이, 착한 아이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거라.”

가까스로 당부의 말을 마친 형님은 요란하고 안쓰러운 기침을 연신 해댔다. 그런 바람에 그 얼굴은 홍당무가 다되었다.

, 개똥아, 아니 이제, 길동이지. 길동아, 이제 와서 말이지만 정말 고마웠다. 넌 이해 못하겠지만, 내 어릴 적 넌, 내 생명의 은인이었다. 널 아우로 받아주고 키워준 것은, 그 은혜를 갚은 것뿐이야. 그때 날 안던 너의 든든했던 모습이 아직도 내 눈엔 선하구나. 언젠간 너도 알게 될 날이 있을게다. 어쨌든 진짜 가족들도 꼭 찾길 바란다. 그러려면 그분들을 기다려야 할 텐데...”

말을 끝맺지 못한 형님은 내손을 꼬옥 잡고서 마지막 눈을 감으셨다.

형님~!”

나는 울며 소리쳤고 그때 형님 손에서 내손으로 환한 빛이 옮겨져 왔다. 그 빛은 나의 손에서부터 머리카락 끝과 발가락 끝까지 퍼져나가며 한동안 내 몸을 번쩍였다. 반대로 형님은 점점 삐쩍 골아, 앙상한 나무가락처럼 변해갔다.

이리 가시면 안돼요, 형님!”

나는 형님의 몸을 부여잡고 소리치며 울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 몸의 섬광은 곧 수그러지고 동시에 형님의 숨도 점차 약해져만 갔다. 곧 우리가 있는 땅의 환함까지도 수그러지고 대신에 석판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 석판 건너편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어디인가? 그 사내는 어디로 갔을고...”

 

**

 

그때 그, 이 나라 네 번째 선대임금께서 오신 것이지요? 연산군마마께 붙은 악귀를 같이 물리쳤다 하지 않았소?”

이야기를 듣던 허균이 어린아이처럼 똘망똘망한 눈으로 물었다.

그렇소, 물론 악귀는 도망치긴 했지만. 어쨌든 그땐 대군마마이셨던 전하께서 그때의 세자저하와 함께 나타나셨죠. 아마 시간여행 중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려다가, 의도치 않게 그곳으로 오셨다 하더이다.”

, 그것도 하늘의 뜻이겠지요! 놀랍군요.”

, 그런가보오. 그때부터 내 운명도 바뀌었지요. 설마 내가 형님을 대신해 연산군에 붙은 악귀도 물리치고 시간여행자가 될 줄은...”

얼마나 좋소? 덕분에 저와 누이와도 만나게 되고, 이건 분명 하늘의 뜻이요!”

분명,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 허균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큼은 처음 만났을 천진난만한 꼬맹이시절의 것이 되어 밤새 내 이야기에 집중했다.

꼬끼오~!

수탉이 울었고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초희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

 

잘 다녀와, 혹시 알아? 이번에 만나게 될지. 혹 이번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점점 그날을 향해 가고 있는 거라니까?”

그녀의 격려 덕에 오늘도 발걸음이 가볍다.

역시 초희는 날 다룰 줄 안단 말이야?’

어젯밤 음산했던 보름달과 달리 쨍쨍한 햇볕아래에서 괜시리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 다시 힘내는 거야! 내 과거도 초희 말대로 언젠간 마주칠 거야. 초조해하지 말자!’

그나저나 아침부터 궁궐에선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의금부의 국문장 쪽이었다. 임금님께서 요양을 가실 때 탈 가마를 잘못 만들어 부서지게 만든 장영실대감께서 그 국문의 대상이셨다.

국문을 시작하겠다!”

담당자가 크게 외치며 문초와 함께 곤장이 60대쯤 진행되었다.

그때, 주상전하 납시오! 붉은 용포를 휘날리며 일그러진 표정의 임금께서 내관들을 거닐고 나타나셨다. 직접 불경죄를 묻고자 왔노라고 의금부 담당자를 밀어내고 의자에 앉으셨다. 평소 신하들은 장영실대감께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왔었다.

미천한 노비 따위가 감히 정3품까지 받는, 이런 가당찮은 대우를 받다니!”

뭐 이런 식으로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묶여있는 영실대감에게 한참동안을 설교를 늘어놓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셨다.

그런 너의 죄를 엄히 다스림이 마땅하나 아직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니 짐이 덕을 베풀어 형을 감해주겠노라. 100대에서 80대로 감형하노라! 그리고 과인은 네놈을 추방한다!”

대감은 한참 전부터 정신을 잃은 채, 마저 20대를 맞고 옥으로 실려 나갔다.

이제야, 전하께서 맑은 성정을 되찾으셨나 보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전하께선 분명, 돌아가신 상왕전하와 양녕대군마마와의 일로 심신이 상하셨던 게 분명합니다.”

암요, 암요, 드디어, 이제라도 이 나라 종묘와 사직을 지키시는 성군이 되셨으니, 이 얼마나 다행이오! 아니들 그렇소이까? 하늘에 계신 태상왕 전하와 상왕전하께서도 얼마나 흐뭇해들 하시겠소이까?”

붉은 관복을 입은 늙은 대신들이 내 앞을 지나가면서 세상사 자기네들 손바닥안인마냥 호탕하게 웃어댔다.

아주 그냥, 충신 중의 충신들이 따로 없구만, 지랄들을 허시네~!

지나가는 중신들을 보자니 내 입에선 한숨이 절로 내쉬어졌다.

 

이것 참, 명나라 빠돌이 새끼들만 아니었어도, 이런 귀찮은 짓 꺼리는, , .”

방에 앉은 임금은 입술을 실룩거리며 탁자를 한번 쳤다.

전하, 하온데 그 빠돌이 새끼란 말은 무엇인지요?”

앞의 신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정중히 물어왔고,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임금은 말했다.

, 그런 것이 있네, 썩 좋은 표현은 아니니 새겨듣지 말게! 그나저나 이천, 장영실은 무사히 떠났겠지?”

임금이 물었다.

~ 전하! 지금쯤이면 무사히 수원군 그 숲으로 당도하였을 것이옵니다! 분부대로 을묘년, 연산군마마께 붙은 악귀를 물리칠 때 일원이 된 홍길동이란 자가 함께 떠났사옵니다.”

이천이 대답했다.

 

이천은 장영실과 함께 발명품들을 함께 만든 장영실의 선배 천문학자 쯤 되었다. 이자의 아버지 대까지는 임금의 집안과는 원수가 될 정도로 반대세력이었다. 이천은 그 반대로 충성을 맹세하고 장영실과 협력해 많은 업적을 이루기까지 한 인물이다.

 

하온데 전하~ 그 도적들 중에 하필 홍길동을 선택하셨사옵니까? 그자는 한번 폭주한 자라 위험하지 않사옵니까?”

이천이 물었다.

, 전우치는 다른 곳으로 이미 보냈고, 장길산 임꺽정은 아직 이 왕조에 대한 반감이 높네! 그들에게는 아직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들을 일단 그곳에서 충분히 편히 지내도록 할 것일세! 그리고 무엇보다 그 홍가 그자는, , 둘의 합이 잘 맞지 않던가? 영실대감이 잘 할 걸세.”

임금은 말을 살짝 흐렸다. 그리고 한번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들이 없어서, 한동안 조용하겠네그려! 그래도 그대가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네. 이 시대에서도 할 일이 많으니 우리 열심히 이어 가세나! 할 일이 산더미...”

임금은 웃음을 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이천은 임금의 끝맺음 없는 말에 어두운 몰골이 되어 급하게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물러갔다. 임금은 줄행랑치는 모습에 짜증이 잠깐 났었다.

저런, , 내 얘기가 또 길었나? 해줄 이야기가 아직 많은데...’

그렇게 이천이 물러가고, 방문 앞의 내관을 제외하곤, 임금은 혼자 남았다. 얼마 후, 방에 혼자 남은 임금은 생각에 잠겼는지, 한쪽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다른 한쪽 손으로는 서랍에서 꺼낸 휴대용 해시계를 가만히 만지작거리며 초조한 듯 한마디 읊조렸다.

모두들, 늦지 말아야 할 터인데...”

깜박. 깜박. 깜박.

해시계엔 희미한 푸른빛 네 개가 깜박이며 중앙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깊은 산중, 해는 저물고 어둠이 내려왔다.

부엉부엉

스산한 부엉이 울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한 수레를 장정 다섯이 끌고 밀며 옮기고 있었다. 그 수레는 기절한 어느 죄인을 수송하는 함거였다.

이제, 이쯤이면 되겠죠?”

헐떡대며 앞에서 끄는 장정 한명이 말했다.

!

그 다음 순간, 나머지 장정 넷은 연기를 흘리며 사라졌다.

으음, 길동아, 벌써 다 왔느냐?”

연기가 희미해져 갈 무렵, 기절해있던 죄인이 단잠에서 깨듯, 기지개를 펴대며 물었다.

아주 그냥, 꿀잠이라도 주무셨소? 그만 일어나서 걸어가시죠? 영실대감님.”

힘들다고 투덜대며 길동은 수레를 놓았다.

그래, 알았다, , 녀석하고는...”

영실은 붉은 피가 묻은 흰 옷을 벗어던지고 함거바닥에 숨겨놓은 자신의 편한 옷차림으로 바꿔 입었다.

그나저나, 미래엔 이런 유용한 물건들이 아주 많아서 좋구만. 신기하게도 곤장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 뭐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니까? 아주 놀라워!”

영실은 흰옷 안에 착용한, 전에 미래에서 가져온 무 통증 강화슈트라는 것과 피처럼 퍼진 붉은 물감을 보며 새삼 다시 감탄했다.

, 대감님 연기력이 더 대단하시던데, 이참에 미래로 가셔서 영화배우나 하시지 그래요? 전하는 프로레슬러, 대감은 배우! 아주그냥 대상감, 챔피언감이시네. 아주 딱이시네!”

, 그것도 좋은 생각이야! 너도 가끔은 쓸 만한 생각을 하는구나!”

길동의 말에 영실대감은 좋은 생각이라며 흡족해했다.

으이그, 얼른 가시죠. 다들 가지가지 하신다니까?”

 

*

 

가마가 부서지기 일주일 전, 임금은 장영실과 홍길동 그리고 이천을 불러 모았다.

내 그대들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이리 소집하였소! 앞에 놓인 것은 제국익문사에서 이번에 보내온 서찰이오. 영감이 읽어보시오.”

, 전하!”

영실은 대답한 후, 그 서찰을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민족의 힘을 극대화 하려면 인구감소가 되기 직전의 마지막 삼형제를 찾아 봉인된 힘을 해제시켜야 합니다. 그들은 같은 시대이긴 하나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고 있고, 그 중 한명은 행방이 묘연합니다. 필히, 그들을 한데 모아 화합을 이루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봉인된 힘이 담긴 상자를 열수 있겠습니다.]

마지막 삼형제라뇨? 봉인된 상자는 또 무엇인지요?”

다 읽은 영실이 임금에게 물었다.

, 그것은 과인도 이 조선이란 나라가 세워졌을 때 무학 대사란 분이 과인의 조부이신 태조대왕님과 함께 호압사란 절에 봉인하셨다고만 알고 있네! 자세한건 이 자에게 묻는 것이 좋을 듯싶네. 나오시오!”

, 그 절은 황금호랑이의 힘으로 상자를 억누르기 위해 세운 절이지요!”

임금 뒤쪽 병풍에서 한 여인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셋은 깜짝 놀라 둥그런 눈으로 걸어 나오는 여인을 쳐다봤다.

그대는 누구시오?”

이천이 물었다.

저는 제국익문사 일원이자, 창시자이셨던 분의 자식 되옵니다. 이름은 보명이라 하옵니다.”

그 여인은 대답했다.

창시자라 하면, , 봉인되신 고종전하의? 마마, 소신들이 몰라뵈었나이다!”

셋은 급히 몸을 숙여 예를 표했다.

이러지들 마세요. , 제대로 봉호도 받지도 못했고 시대도 다르옵니다. 어쨌든 이럴 때가 아닙니다. 것보다, 전해드릴 내용이 있어요.”

 

보명의 말에 따르면 미래엔 민족성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위기마다 나타나던 삼형제들이 나타나기 힘든 각박한 세상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왜의 눈을 피해 고종 이재황이 보명을 피신시킨 시대에 마지막 삼형제가 될 만한 형제가 있었다. 보명은 안타깝게도 그들은 흩어져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들을 찾으러 가야 하는 거죠?”

길동이 보명에게 물었다.

, 그런데 당신은... , 아니에요.”

보명은 길동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 그들이 마지막 삼형제인 만큼 봉인을 해제시킬 전설의 삼형제의 힘을 갖고 있을 겁니다. 이들을 찾아야 봉인된 힘을 풀 수 있고, 전 인류의 화합된 힘을 마저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 전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아지는 겁니다.”

길동이 또 물었다.

그런데 왜, 저희에게 이런 임무를... 이런 건 제국익문사에서 해결하는 게 수월하지 않나요?”

보명은 대답하기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그것은, ...”

임금이 대신 거들었다.

옹주를 다그치지 말라! 과인이 먼저 그대들에게 부탁할 것이라고 했네. 명나라 놈들과 이 나라 대소신료들이 그대들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마당에, 이곳에 있다간 나로서도 그대들을 온전하게 지켜주지 못할 것이야! 그리고 자연스레 역사 밖으로 나갈 좋은 기회이지 않는가? 그래서 한 가지 연극을 할까 하는데... 이제 이천을 제외한 그대들 둘은 역사 안에서 사라져 줘야 하겠네. 과인의 형님들과 장인 되시는 분처럼 말일세. 역사 밖에서 계획의 다음단계를 실행해 주어야 할 것이야. 영실대감 부탁함세! 길동 자네도 마찬가지고! 이천, 자네는 이곳에서 나와 함께 하세나!”

! 전하! 분부 받들겠나이다!”

임금은 연극을 설명했고, 보명이 미래에서 가져온 강화슈트와 가짜피로 연극을 하게 된 것이다.

 

*

 

수원군에 위치한 이 높지 않은 산자락엔 일행들이 주문을 외울 때마다 시간이동을 시켜주는 장치들이 숨겨져 있다. 혼천의, 앙부일구, 측우기, 수표 같은 역사적으로는 천문기구로 알려진 장영실의 발명품들 전부.

 

어허, 해설자 이놈! 측우기는 내 아들이 만든 것이야! 사실대로 말하지 못할까? 우리아들이 만든 신기전으로 네놈 몸뚱이에 구멍을 내주랴?”

그냥 넘어가자! 지 아들일이라고 챙기기는! 알았어, 알았어, 맞는 말이긴 하니까. 측우기는 네 아들이 만든 거야 그래! 네 파트 이제 끝났으니까 들어가!

 

어쨌든 문종이 만든 측우기를 포함한 이것들은 실제로는 시간이동장치란 목표를 향해 순차적으로 발명된 것이다. 평상시엔 중앙의 한 석판을 중심으로 숨겨져 있다. 주문이 외워지면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으로 불리는 석판에 힘을 모이게 하여 앞에 서있는 일행들을 다른 시대로 옮겨 주는 것이다. 이 석판은 궁궐에도 비밀리에 하나가 설치되어 쉽게 순간이동을 하여 갈 수 있게 하였다. 임금의 죽음직전 궁궐의 것은 역시나 비밀리에 어느 산자락에 옮겨두었다가 지금은 고궁박물관 지하에 전시되어있다. 현대까지 선택된 자 말고는 이런 것들의 존재조차 아는 이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우가자카, 우가우가, 우가자카, 우가우가...”

둘은 석판 주위를 돌며 두 손을 무릎과 머리 위를 오가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주문치고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중얼거림이었다.

, 이거 좀 바꾸죠?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주문 완전 구려요! 듣기론 전하의 것은 안 그런 걸로 아는데...”

길동이 이번에도 투덜댔다.

이래봬도 고대부터 내려오는 신성한 주문이니, 나도 별수 없느니라! 전하께는 다른 방법을 고안해냈지. 신하된 도리로 전하께 이런 걸 시켜드릴 순 없지 않느냐? 여기 것도 나중에 바꿀 것이니까 일단 잔말 말거라!”

이 주문을 외우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새 왕조가 어찌 될라고 저런 놈들이 끊이지 않아?”

혹시 전부터 이 둘의 모습을 본 자가 있다면 혀를 차며 돌아갔을 것이다. 어쨌든, 주문은 다 외워졌고 둘은 석판을 통과해 사라졌다.

 

어느 시대인지 가늠조차도 되지 않는 먼 시대! 지금 막 도착한 둘의 눈엔 산자락 주위로 끝없이 펼쳐진 모래산맥들만이 들어왔다. 이 공간만은 석판과 장치들의 힘이 남아있는 덕분인지 작지만 울창한 숲을 유지할 수 있었던 듯 보인다. 영실과 길동은 숲을 벗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런, 또 오류가 났나보구나. 이곳은 옹주님이 말씀하신 시대가 아닌 듯 하구나. 헌데 이곳은 종말의 시대인가? 전쟁이라도 끝난 직후인가?’

영실은 어리둥절했다. 곧 둘 위로 작은 뭔가가 날아왔다. 그 작은 몸체에는 번쩍이는 글자판이 보였다.

[이곳을 떠나십시오! 혹시 시간여행자이시면 부디 한라산을 한번 들렀다가 떠나주시기 바랍니다. 부탁합니다! 옆에 버튼을 누르면 여러분을 태울 수 있는 자율주행 비행차가 될 것입니다.]

글자들이 너무 눈부시고 이리저리 움직여서 한참을 보고 나서야 그 뜻을 파악할 수 있었다.

시간여행자라니, 우리가 올 줄 알고 있는 듯이 적어놨군!”

장영실은 그 정체가 궁금해졌다.

아 그냥 우리 떠나요! 이 시대는 아닌가 봐요!”

길동은 이 시대가 두려운 건지 재촉했다. 영실은 날아온 작은 물체를 무시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결국 길동을 설득해 한라산으로 가보기로 결정했다. 빨간 것을 누르니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작은 물체는 둘이 들어갈 만한 비행물체로 변모하였고 입구로 생각될 만한 것이 열렸다. 과히 입이 쩍 벌어질만한 괴괴한 형상이었다.

, 괜찮겠지?’

문이 열리고 둘은 살짝 불안함 마음이었지만 안으로 올라탔다.

 

길동과 영실대감을 태운 그 비행체는 한동안 비행을 해 나갔다. 투명 유리창으로 내려다본 대지는 너무나도 삭막했다.

길동아, 이곳이 도대체 어디인고? 우리가 살던 산천지가 맞느냐?”

사막으로 변한 대지를 바라보며 영실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옆에 있던 길동도 대답대신 오묘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밑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런 것이 미래란 말인가?”

영실대감은 혀를 한번 차댔다. 한라산에 도착한 무렵, 둘은 더 이상 갈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눈앞에 붉은 기둥이 계속해서 솟구쳐 오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불기둥은 하늘 반대편으로 쏟아지기라도 하듯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계속해서 솟구쳤다. 그 주위엔 뜨거운 바람이 직접 맞았다면 눈을 못 뜰 정도로 세차게 불어댔다.

으악 뜨거워, 이게 대체...”

비행물체 안의 영실과 길동은 뜨겁고 붉은 그 기운에 앞의 창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수그렸다. 그때였다. 바람이 멈추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주셨군요!”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목소리에 집중할 뿐이었다.

 

전 이 대륙을 지키는 사신 중 하나인 남쪽을 지키는 주작입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 보니, 사신들 모두 사라지고 저 혼자만 이렇게 불기둥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북쪽의 현무님과 동쪽 서쪽의 청룡 백호도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실제로 이제 여기의 저도 그 수명을 다해 갑니다. 곧 이 반도는 무너지겠지요! 이 시점의 미래는 더 이상 없습니다. 과거로 돌아가서 현무님을 구해만 주신다면 이런 미래는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과거의 시간에서 오셨죠? 시간을 관리하는 아저씨께 들었습니다. 부디 현무님을 구해주세요! 그분 말대로라면 임진년에는 현무님이 고집을 꺾지 않기 때문에 소용이 없을 겁니다! 아마 2016년 정도 쯤으로 가셔야 할 것입니다. 이제 빨리 이곳을 떠나세요! 곧 붕괴될 것으로 보여 위험합니다! 저의 심장을 수정으로 만들어드릴게요! 더 자세히는 시간이 없으니 못해드리고요! 부탁드립니다. 현무님을 구해주세요! 당신들에게도 힘이 될 것입니다. 당신들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영실의 손에 수정이 만들어졌고, 더 이상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서둘러야 할 것 같은데요? 수정에 금이...”

영실의 손에 들려진 주작의 수정에 금이 약간 가 있었다. 비행물체는 그들을 다시 숲에 데려다 주고 하늘 위로 사라졌다. 주작이 준 수정을 챙겨 숲에 내린 영실은 아까 도착했을 때 보다 숲의 규모가 어딘가 모르게 줄어든 모습에 조바심이 났다. 둘은 서둘러 주문을 외웠다. 수정이 빛을 내는 순간 영실은 외쳤다.

가자 2016년으로!”

둘은 사라져 버렸다. 이런 시대의 이 숲에도 이 둘의 모습을 훔쳐보며 신기하게 여길 자가 있을까?

 

2016. 암울했던 아득한 먼 미래에서 그들이 막 도착했다. 이번엔 숲이긴 한 것 같은데 주위에 바다가 보이고 섬인 듯 했다.

이 수정이 이곳으로 보내 준건가?’

영실은 가방에서 수정을 꺼내보며 생각했다. 그때였다. 수정은 금이 점점 심해졌고 이내 산산조각 나버렸다.

안 돼!”

영실과 길동은 놀라서 누구먼저 할 것 없이 외쳤다. 그 조각난 파편들은 붉은빛을 뿜어대며 하늘 위로 솟구쳤다. 그 파편 무리는 흔들어진 벌통에서 출동한 벌떼들처럼 하늘위쪽으로 돌진해가다가 어느 순간 방향을 바꿔 바닷물 속으로 흩어지며 요란하게 돌진해 들어갔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길동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것이냐!”

둘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잠잠해진 바다 쪽을 바라봤다. 고요함도 잠시, 곧 거센 바람이 불며 파도가 거칠어졌다.

누가 나 현무의 잠을 깨운 것이냐!”

바람을 타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간 있었던 일들과 미래에서 주작이 했던 말을 영실이 현무에게 전해주었다. 현무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현무는 대답했다.

이곳에 조만간 큰 파도가 일어날 것 같구나!”

큰 파도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길동이 되물었다. 현무는 말을 이어갔다.

누군가 이 시대의 큰 혼란을 야기하고 있단 말이다! 너희가 이곳으로 온건, 나를 도와 이 시대를 평안케 하라는 뜻 같구나.”

현무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땅엔 동서남북으로 우리들의 거처인 섬들이 하나씩 존재한다. 이 땅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은 모르지만 우리 사신들의 보호 속에 자리를 지켜오고 있지. 지금도, 그리고 너희들의 조선이란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미래에서 만나고 왔지? 지금은 잠든 남쪽 제주도의 주작, 북쪽 끝자락 녹둔도의 나, 현무. 그리고 독도의 청룡과 강화도의 백호, 이렇게 넷이 사신으로 있다. 그 중에 내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역할을 맡아오고 있지. 동부여를 탈출하던 주몽이란 자도 있었고, 이방원 앞에서 군사훈련을 하던 때도 생각이 나는군. 이순신이란 자가 제일 인상이 깊어. 녹둔도에서 나를 발견했고, 그 힘을 빼앗으려한 여진족에게 힘을 빼앗기지 않으려 싸운 자이지. 왜가 쳐들어왔을 때도 나의 힘을 이용해 거북선을 만들어 싸웠고 말이야. 안타깝게도 그때의 조정은 나를 인정하지 않았지. 설상가상으로 이순신은 그자의 외골수인 성격 탓에 왕에게 미움까지 사버리게 된 거야. 결국 힘을 원균이란 자에게 빼앗겨 버렸지! 그자도 뛰어난 장수였지만 나의 힘을 쓸 줄 모르면서 무작정 전장에 끌고 나섰다가 전멸하게 되었지. 때문에 난 힘도 못 내보고 이곳, 칠천량에 잠들게 된 것이다! 지금 이 힘은 나의 일부뿐, 본래의 것은 녹둔도 어느 깊숙한 지하 동굴에 숨겨져 있다. 이순신이 만약을 대비해 힘 전부를 가져나오진 않고, 동굴을 봉인해 둔 덕분이다. 그런데 이곳엔 섬의 형태도 아니고 이 나라 국경 밖으로 되어있구나! 어쨌든, 이제 또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때가 온 것인가, 날 부활시킨걸 보면! 이곳 대통령이란 자가 어느 사악한 자에게 놀아나고 있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이 시대 사람들의 분노로 이 땅이 망가지기 시작하는 듯 보인다. 이대로는 미래가 황폐해질 것이 뻔하다. 이미 누군가가 청룡, 백호의 힘에게 이끌리는 듯한데, 너희도 나와 주작의 힘을 움직여 주겠느냐?”

 

긴 이야기를 마친 현무는 간곡히 길동과 현무에게 부탁하는 어조로 말했다.

대감님! 모른 척 할 수는 없잖아요! 저희가!”

길동은 예전 형님을 고문해 죽음으로 몰고 간 연산군이 생각났는지 눈을 바르르 떨며 말했다.

전 그런 놈들 용서할 수 없어요!”

그래, 그리고 그때 도망쳤다던 요괴 짓일지도 모르니 가보는 수밖에!”

영실대감도 현무와 길동의 제안에 동의했다.

 

현무의 이야기를 들은 영실과 길동은 현무와 같이 하기로 한다.

근데 주작님도 그랬지만, 현무님도 상당히 말씀이 많으시네. 사신은 다 그러신가?’

이제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되죠?”

길동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앞으로의 일을 물었다.

우선 일부지만 이 힘을 부활시켜야겠다. 나의 몸, 거북선을 다시 복구시켜야겠어!”

바다는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점점 거세지는가 싶더니 이내 또 잔잔해졌다.

왜란 때의 몸체는 흩어졌지만, 이곳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잠들어있는 잠든 영혼들이 아직 떠돌고 있구나! 그 수가 꽤 상당하군! 이제 그들의 한을 풀어주어야겠어! 너희들이 좀 도와주어야겠다!”

현무의 말이 끝나자, 수면의 파도들이 다시 거칠어졌다. 한 수정이 수면위로 떠올라 공중 위를 날았다. 방금 전 깨졌던 주작의 수정보다 커지고 울긋불긋 거칠어진 수정이 그들에게 날아왔다. 영실과 길동은 수정에 손을 대자 수정의 안에서부터 빛줄기들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밑으로 꺼진 빛줄기들은 땅속으로 흡수되는 빨려 들어갔다. 솟구친 빛줄기들은 하늘위로 뻗어가거나 방향을 틀어 바다 속으로 가는 것들도 여럿이었다. 그렇게 빛줄기는 사라졌고, 수정은 영실대감 손에 살포시 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무리 기다려도 영실과 길동 앞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뭐죠? 우리가 잘못 건드린 건 아닐까요?”

길동이 답답한지 물었다.

기다려 보자꾸나!”

영실은 수정을 손에 조심스레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둘은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며 기다릴 뿐이었다. 곧 땅이 흔들리고 바다의 물결이 점점 거칠어져갔다.

이거 지진이라도 난거 아녜요? 괜찮으세요, 대감님?”

흔들리는 땅 덕에 길동과 영실은 저만치 떨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영문도 모른 채 바짝 엎드렸다. 곧 거친 파도가 일더니 거대한 쇳덩어리가 수면을 지나 하늘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뿐만 아니라 나무며, 금속이며, 여러 재질의 많은 자잘한 조각들이 덩어리 주위로 떠올랐다. 그것들은 쇳덩어리 주위를 천천히 공전했다. 덩어리는 주위 조각들을 빨아들여 점점 몸집을 키워갔다. 계속해서 꿀렁꿀렁 울렁이더니 뭔가의 형태로 갖춰나가는 듯 했다.

그만 일어나서, 그 수정을 이쪽으로 던져라!”

해풍을 타고 현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악!

점점 무거워진다! 길동아, 이것 좀 받아 보거라!”

영실은 길동을 향해 소리쳤다. 영실에 말에 길동은 한번 바위에 한발을 디딘 후에 영실대감에게 다가와 수정을 건네받았다.

참 내, 이딴 것이 뭐가 무겁다고, 대감님, 운동 좀 하셔야겠, ,”

점점 무거워지는 수정에 길동은 당황했다.

거봐라! 어른 말 좀 들어라! 더 무거워지기 전에 어서 던져!”

아우, 알겠어요! , 갑니다~!”

길동은 수정을 두 손으로 꽉 쥔 채, 몸 전체를 몇 바퀴 돌렸다.

어우 어지러워, 자 던집니다!”

수정은 길동의 손에서 발사되어 덩어리쪽으로 솟구쳤다.

!

녀석아! 너무 쎄게 던진 거 아니냐?”

에이 몰라요.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죠, 영감님!”

순간 영실과 길동 쪽으로 모래바람이 불어 닥쳐 그들의 눈을 감기게 했다.

으아아악!

그들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 잔뜩 수그려있는 동안, 덩어리는 계속해서 온전한 형태를 점점 갖춰나갔다. 한참 후에 드디어 바람이 멈춰, 그들은 몸을 다시 일으켜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곳엔 황금색 철갑선 하나가 완성되었다! 몸체는 단단한 등껍질에 뾰족뾰족한 것들이 솟구쳐있었고 뱀들의 형상들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앞머리엔 용의 모습을 한 거북선의 형상이었다. 주위로는 자잘한 번개가 계속해서 쳐댔다.

크아아앙!

괴수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고 뒤쪽에서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황금색 빛줄기가 내려왔다.

저기, 대감님, 저거 오줌줄기 아녜요? 설마하니 오줌 싸시는 건 아니겠죠?”

그러게 말이다. 왠지 지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다소 지저분해보이는 모습에 지상의 길동과 영실은 적잖이 당황되었지만 내색은 못하고 소곤댈 뿐이었다. 그 줄기는 점점 구부러지더니 계단의 형태가 되었다. “둘이서 뭘 그리 소곤대는 것이냐? 광화문에서 큰 불이 번질 것 같구나, 일단 어서 가봐야겠다! 어서 올라 타거라!”

, ~!”

현무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둘은 찝찝한 마음은 애써 숨기고 계단을 따라 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배는 순식간에 광화문광장에 도착했다. 도착한 광장은 붉은 촛불로 바다를 이루었고, 곧 어디선가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들어라! 대한민국 민초들이여!”

그 다음 순간 갑작스런 번개가 일행의 거북선을 공격했다. 배는 그 번개에 맞아 밤하늘에 자그마한 불길을 한번 긋고 사라져버렸다.

 

콰광쾅쾅!

어느 무인도 하늘에도 번개가 쳤다. 번개는 모래사장에 내리꽂혔다. 그 순간, 용의 머리를 하고 몸은 거북모양을 한 황금색 배 하나가 모래를 가르며 나타났다. 길동과 영실이 타고 있는 현무의 거북선이었다. 이윽고 배는 어느 바위에 부딪혔다. 바위는 선체를 무자비하게도 찌그러트리며 배를 멈췄다. 용의 머리에선 포효소리가 크게 울렸고, 선체 여기저기에선 연기가 났다.

이런, 예상치 못한 난기류를 만날 줄이야!”

배문이 열리고 그 곳에서 콜록거리며 나오는 영실이 말했다.

그러게요. 갑자기 번개가 칠 줄은... 이제 어쩌죠. 대감님? 여긴 어딜까요?”

뒤따라 나오던 길동이 물었다.

글쎄다. 현무님이 깨어나시기 전까지 이곳에서 잠시 머무를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을 것 같구나!”

영실은 막막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광화문 위에 그 사람은 뭐였을까요? 공중에 떠 있던 것 같던데...”

그러게 말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원!”

둘이 고심을 해봐도 더 이상은 방법이 없었다. 현무가 다시 정신을 차리길 기다릴 뿐이었다.

 

밖으로 나온 둘은 일단 섬의 이곳저곳 먹을 만한 것들과 장작으로 쓸 만한 나무들을 찾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길동은 망토와 검 한 자루를 발견했다.

대감님 이것 좀 보세요! 이곳에 이런 게...”

영실도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대답 없이 어딘가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뭘 그리 보세요?”

망토와 검을 주워 영실에게 다가온 길동도 같은 곳을 바라봤다. 그곳엔 붉게 빛나는 길쭉한 모양의 수정이 심장이 뛰듯 꿈틀거리며 모래에 박혀있었다.

, 뭐지? 저 기분 나쁜 물건은?’

둘은 선뜻 그것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이러는 사이 이들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하늘 저 멀리에서 무언가가 그 섬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검고, 묵직한 무언가가...

 

2. 준서

 

청문회장이다.

멍한 표정의 사람들 몇몇이 소환되어 나와 있었다.

증인, 어서 똑바로 대답하세요!”

국회의원들은 카메라를 의식한 듯,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무슨 랩퍼마냥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여기서 눈에 띄어야 다른 방송도 출연하고 사이다영웅으로서 한때나마 유명세를 떨칠 수 있으리라. 반대로 증인석의 사람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말도 횡설수설하며, 나 멍청이요! 하면서 시간을 때우는 모습들이었다. 심지어 빈자리들도 많아보였다. 이를 아무도 모르게 중앙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투명망토를 걸치고 검 하나를 허리에 찬, 눈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강준서라는 사내였다.

저런 놈들이 우리의 대표란 말인가?’

 

이런 한심한 개돼지만도 못한, 버러지 놈들! 더 이상 너희들에게 맡기지 못하겠노라! 다들 비켜라! 이놈들은 내가 데려가겠다!”

걸걸한 웃음소리와 함께 실체 없는 목소리가 청문회장에 울려 사람들의 귀를 자극했다. 평소 사극을 즐겨보던 준서는 그 사극 특유의, 특히 좋아하는 궁예나 견훤의 톤을 써먹을 기회가 온 것이다.

뭐지?”

누구야?”

하나같이 이리저리 둘러보며 그 실체를 찾으려 헤매는 모습들이었다. 곧 충격파가 일어 국회의원들과 증인들이 의자에서 떨어져나갔다. 다음 순간, 증인들은 소리를 빽빽 지르며 하늘위로 떠올랐다.

시끄럽다. 지껄이지 말고 조용히 가자! 버러지 놈들아!”

실체 없는 목소리가 다시 들리니 증인들은 겁에 질린 듯 했다. 계속해서 소리 지르기 바빴고 기절하는 자도 늘어났다.

국회의원 놈들, 언론 놈들, 네놈들은 다음차례다! 각오하고 있어라 이놈들!”

야단법석이 된 청문회장을 뒤로한 채 준서는 증인들을 둘러메고 날아갔다. 망토는 준서에게 초인적인 힘으로 여러 명을 동시에 들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주었다. 준서는 내심 신기해하며 청문회장을 떠났다. 마지막 울림에 기겁을 한 국회의원들과 기자단들은 청문회장에서 도망치기 바빴다. 날아가며 그 광경을 본 준서는 깊은 한숨을 한번 뿜었다.

 

준서는 잡아들인 증인들에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 이 무리의 우두머리의 위치를 찾아냈다. 시간이 지나자 기절했던 증인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리저리 허둥거릴 뿐 도망치지 못했다. 그곳은 무인도였기 때문이다. 국내 섬인지 외국섬인지도 알 수 없고 수평선 넘어 섬 하나 보이지 않는 곳! , 세상에서 동 떨어진 곳이었다. 증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불참자까지 끌려와있었다. 비로소 완전체가 되어있었다. 준서는 아직 망토를 걸치지 않은 상태로 높은 바위 위에서 그들을 지켜봤다.

! 다들 일어나셨나요? 제가 여러분을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준서의 행사멘트는 그가 든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 그러자 증인들은 과자를 먹다가 뺏긴 아이들처럼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자신들이 아는 욕을 다 발사하며 준서 쪽으로 달려들었다. 걸음걸이는 좀비들처럼 뒤뚱거렸다.

요것들 걸음걸이들 보소! 하나같이 좀비학원이라도 다니셨나? ! ! 시끄럽고요. 여러분도 이제는 지옥의 맛을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제가, 여러분을 위해 지옥의 맛을 보여드리려 자그마한 선물들을 여러 개 준비를 해봤습니다! 열심히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렛츠 고~파리 투나~! 부디 제정신으로 살아남아 주세용, 안녕.”

클럽 디제이가 된 양 말했다. 말을 마친 준서는 망토를 두르며 파티의 시작을 알리듯, 확성기를 떨어트렸다. 준서의 손에서 떨어져 나온 확성기가 땅바닥으로 고꾸라진 순간 준서는 사라졌다. 곧이어 모래밭에서 기괴한 뱀같이 생긴 거대하고 끈적한 생명체들이 차례로 이빨을 내밀며 꿈틀꿈틀 튀어나와댔다. 완전체들은 기겁을 한 듯, 동그란 눈의 같은 표정들을 하며 도망을 다녔다. 그러나 도망갈 구멍은 여전히 없어보였다. 바다에서도 모래밭에서도 근처 숲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있을 거라는 상상도 못했던 생명체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와서 증인들을 방방 뛰게 만들었다. 영화 속 미끌거리는 외계생명체를 만난 주인공들 마냥 있는 대로 울부짖었다. 그 외계생명체들은 줄에 걸린 과자 따먹기를 하듯이 증인의 살점들을 뜯어먹으려 쫒아 다녔다. 그 수와 종류도 점점 무인도를 촘촘히 채웠다.

 

, 민은국이!”

준서는 아까 잡아들인 증인들의 우두머리 앞에 와 있었다.

, , 누구야? ,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민은국은 준서를 보자 눈을 똥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떻게 안거는 은국이 네가 알거 없고! 내가 좀 피곤하거든? 빨리 끝내자! 너 잡으려고 니네 조무래기들 잡으러 다니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아? 그놈들, 뭘 그리 쳐 먹었는지 엄청 무겁데! 팔 빠지는 줄 알았잖아!”

준서는 팔과 목덜미를 주물러가며 말했다. 은국은 당황했는지,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더니 은국은 부르르 떨며 멱살을 잡으려 달려들었다. 준서는 잠시 사라졌다가 다른 곳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너 같은 것들 잘 알아! 얼마 전에도 비슷한 놈을 벌주고 왔단 말이지! 그놈도 벌벌 떨면서 내 멱살을 잡더라! 지가 먼저 가만히 있는 사람의 인생, 시궁창에 빠뜨린 것도 모르고 말야... 어쨌든 그런 면들도 공통점이 있네 있어~ ? 아주 그냥, 학원들 다니셨나봐? 리액션이 아주 응?”

준서는 계속 일부러 더 깐족댔고, 은국은 울먹였다.

저한테 왜 그러세요? ? 누구신데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 시키는 대로만 했어요. 아무것도 몰라요.”

준서는 또다시 웃음이 났다.

우두머리가 더하네 더해! 너만 살겠다고 발뺌하는 거여? 그 학원에서 뭐, 심화과정이라도 들었뉘?”

준서는 말을 이어갔다. 준서는 은국의 뺨을 사정없이 때려가며 물었다.

네놈!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얼마나 개쪽! 당하고, 개고생! 하는지, 알아? 미친것아? 알아? 아냐고요~! 아유~이걸 그냥~확 그냥~~”

준서는 놈의 얼굴과 복부를 수차례 가격했다. 우두머리는 힘없이 쓰러졌다. 준서는 쓰러진 우두머리를 보며, 며칠 전 똑같이 자신에게 울부짖다 쓰러진 놈을 떠올렸다.

 

그놈도 울먹이며 외쳐댔었다.

왜 그러세요. 저희한테...”

그리고 곧이어

이 새꺄~너 뭐하는 짓이야 이게~! 이게 뭐야! 저 사람들 살려내, 살려내라고!”

내 멱살을 잡으며 날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놈의 손은 떨렸고 전혀 위협적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그냥 힘을 잃고 고꾸라졌다, 지금 내 앞에 쓰러져 있는 이냥반처럼...

 

그때 마침 저승사자 분을 만나서 난 그에게 복수를 깔끔하게 마칠 수 있었다. 그 배불뚝이 아재의 외모완 다르게, 이 힘은 날카로운 게 꼭 칼날 같다.

별 것도 아닌 것들이 까불어. ...”

준서는 하품을 한번 길게 늘어지게 하며 쓰러져 떨고 있는 은국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이 일당들은 이 검으로 편하게 해주고 싶진 않아!’

그 순간 준서의 눈은 붉은빛으로 잠깐 감돌다가 수그러들었다. 준서는 남자를 업고 광화문 광장에 갔다. 가는 도중에 준서는 남자의 머릿속을 잠깐 훑어봤다.

이 왕실장이란 놈은 또 뭐야? 뉴스나 증인명단엔 없었는데? 아주 양파같은 놈들이구만!’

준서는 남자의 머릿속, 인생영상에서 왕실장이란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쩐 일인지 딴 놈들과는 다르게 변조된 목소리였다. 준서는 곧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은 붉은 촛불행렬로 바다를 이루었다. 준서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남자를 둘러메고 광화문 위쪽 하늘에 떠있었다. 깨어난 남자는 곧 발버둥 쳤다. 준서는 그런 남자를 내려놓으며 목을 꽉 잡았다. 남자는 컥컥댈 뿐, 힘을 못 썼다.

 

광화문 광장에 선 준서는 남자의 목을 쥔 채, 숨을 한번 고른 다음, 외쳤다.

들어라! 대한민국 민초들이여!”

준서의 외침은 확성기를 통하지 않아도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순간, 준서는 흥분되었다. 마치 자신이 지금, 즐겨보던 사극의 마지막회에서 대치하고 있던 자신의 병사들을 큰소리로 호령해 제압하던 후백제황제 견훤이 된 것만 같았다.

콰광쾅쾅!

하늘도 놀랬는지 번개가 한번 쳤다. 번개가 그었는지, 광화문 건너 저편 하늘에선 형체모를 불줄기가 공중에서 한번 그어졌다. 행진하던 촛불행렬들은 멈춰 서서 말없이 준서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어 봤다. 주위는 고요해졌고 준서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보아라! 편법으로 니들 위에 군림했던 잡것이 여기 있노라! 지금이 왕정시대도 아니고, 지들 맘대로 하는 이딴 사태가 말이 된다고 보는가? 더 이상, 정부랍시고 있는 이놈들의 만행을 그저 지켜볼 수만은 없다! 뭐가 무섭다고 이런 한낱 버리지들에게 우리의 목숨 줄을 우롱 당한단 말이더냐? 그것은! 비단 기득권층만의 문제가 아니다! 너희들 한사람, 한사람의 무관심도 한몫했을 터! 자신들의 일이 아니면 혹은 자신의 식구들 일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던 너희들! 지금도 별 차이 없을 테지. 몇 년 전, 많은 목숨들을 잃어 비통해 할 때도 그렇다. 그 추모불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던가? 심지어 지겨워 그만하라는 질책까지 하는 버러지들도 있었지! 그 버러지들은 이 일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뿐이겠는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많은 수의 선생들은 철밥통 연금만 신경 쓸 뿐, 왕따 문제, 인성교육 같은 것엔 통 관심들이 없고! 또 많은 의사들은 의료수가만 따지고 무거운 책임은 회피하고! 연금 철밥통만 쫒아온, 책상 앞에서만 만점을 받은 공무원 대다수들!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인력들로 전락했지 않았는가! 이 밖에도 너무 많아서 일일이 헤아리기도 힘들다. 또 많은 수의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지 주머니 사정만 생각하는 이 부패한 나라! 그대들은 이대로 가만 둘 것인가?”

준서는 한번 크게 숨을 내쉬고 난 뒤 말을 계속 이었다.

그런데 정녕, 이것이 그들만의 문제인가? 그들만의 욕심이겠는가 말이야? , 그대들은 갖지 못해 그저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아닌가, 잘 한번 생각해 봐야하지 않느냔 말이다! 혹여나 그런 마음이었다면 이젠, 그딴 후진 생각은 버리고 선진적인 생각으로 행동해야하지 않겠는가? 더 이상 신민이 아닌 시민으로 살고자 한다면 말이야!”

 

준서는 팔을 뻗어 무인도에서 지옥의 파티로 한창 뛰어 다니고 있던 증인들을 소환해냈다. 괴수들에게 뜯어 먹힌 살점들은 돌아왔지만 넋은 아직 반쯤 나간채로 침들만 질질 흘려댔다.

파티는 잘 즐기셨나, ?”

증인들을 향해 한번 코웃음 친 준서는 다시 군중들에게 소리쳤다.

자 보아라! 나라를 휘청거리게 한 이놈들도 너희들과 똑같은 한낱 사람이다! 이 세상엔! 태어날 때부터 나라를 잘 이끌고 갈 타고난 리더, 고귀한 리더, 위대한 장군 뭐 이딴 존재는 애초에 없다! 단지 너희들이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틈을 타 이것들이 그 자리를 채웠을 뿐이다! 고로 너희들에게도 책임은 있는 것이다! 너희들의 무지와, 무관심을 탓하라! 너희들의 안일함을 탓하라! 원망만, 절망만 하며, 정의를 남에게 의지한 너희들의 자세를 탓하라! 너희들의 늦은 후회를 탓하라! 이 버러지 같은 놈들아!”

 

말을 마치며 준서는 우두머리를 지상의 촛불행렬 옆으로 던졌다. 그 순간 그 증인들도 덩달아 지상으로 떨어졌다. 일부 사람들이 그들에게 달려가 몽둥이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그들은 점차 새우등이 되어가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준서의 눈이 붉게 또 번쩍였다. 그 눈엔 어릴 때부터 근래까지 지금 저기 밟히는, 소위 금수저들에게 학대당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도움은커녕 관심조차 없어 속으로 삭힐 수밖에 없던 자신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흐르는 장면들 속 준서의 모습은 하나같이 새우등을 하며 힘없이, 한없이 울고 있었다. 주마등 속 새우등이 모두 지나간 후, 준서는 말을 이었다.

그래! 그렇게 발버둥치는 것이다! 너희들을 지켜주지 않는, 그럴 생각도 없는 기득권층은 그렇게 밟아줘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밟히지 말고 밟아줘야 하는 것이야! 주인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머슴인지 확실히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기득권층은 더 이상, 모셔야 되는 왕족이나 귀족 같은 게 아니다! 명심하라! 너희들이 이들에게 위임해주는 것이지, 저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권력이란 것은! 스스로 을을 자처하지 말라! 갑이라 착각하는 놈들을 정신 차리게 하라!”

일당들을 밟으려 몰려드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준서는 죽기 직전의 일당들을 다시 무인도로 돌려보냈다.

이제 분풀이는 끝났다! 아니, 너희들이 주도하는 심판과 이 나라를 재건하는 것은 이제 시작인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너희들의 몫이다! ! 너희들을 지켜볼 것이다! 또다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면! ! 다시 나타날 것이다! 탐욕이 가득 찬 너희들의 모습을 처단할 것이다! 멸망시킬 것이다!”

준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준서는 무인도로 돌아왔다. 쓰러져 있는 놈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놈들은 나의 개가 되어 나를 위해 짖게 될 것이야!’

놈들을 한 대 모아 네발 달린 괴수의 형상으로 바꾸어버렸다. 몸은 네발 달린 검은색 몸체 하나였지만 머리는 일당들 수만큼 달렸다. 괴수얼굴들은 합창을 하듯 하늘을 향해 들이밀고 짖기 시작했다.

네놈들은 이제 나의 과업을 위해 일을 하는 충견이 되는 것이다.”

준서는 걸걸한 웃음을 또 크게 지어보였다. 실로 이건 악마, 마왕의 모습이었다.

난 이제부터! 세상을 바꿀 너희들의 주인이다! 주인 말을 잘 들어야 할 것이야, 나의 병신같은 괴수머리들아! 이제부터 할 일이 많으니까 말이다!”

준서는 두 팔을 벌려 번개를 일으켰다. 다음 순간 괴수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망토와 검은 준서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그 무인도 모래판에 나뒹굴었다. 또 하나, 준서의 눈에서 떨어져 나와 날이 바짝 선, 반짝거리는 붉은 수정 한 조각이 한쪽구석에 박혀 빛났다.

 

3. 저승사자의 한탄

 

이런! 일이 이렇게까지 되다니! 심판자의 눈빛까진 좋았는데 폭주를 하다니! 게다가 지 멋대로 지옥의 괴수들까지 동원할 수 있을 줄이야!’

준서가 사라진 무인도로 저승사자가 준서 생각에 씁쓸한 표정으로 돌진해 갔다. 신생마왕이 출현했다는 소문으로 천당과 지옥 할 것 없이 모두 비상이 걸렸다. 화가 난 염라대왕은 저승사자에게 수습해야 할 책임을 떠안겼다. 수습 못하면 책임자를 소멸할 것이라 엄포를 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난 시키는 대로만 했는데 내가 왜?’

저승사자는 억울했다. 가뜩이나 현세에 들어 일이 많아졌던, 그래서 피곤에 절어 어두운 그의 낯빛은 더욱 흑 빛으로 변해만 갔다.

, 배고파! 내 배는 누가 책임져주나? 으 머리야, 이 갓 좀 집어던지고 싶다.’

저승사자는 그의 큰 머리를 쥐어짜며 달라붙은 작고 얄따란 갓 때문에 두통에 시달렸다. 살찐 그의 머리통 때문인지, 전엔 널찍했던 갓은 이제는 머리 밖으로 빠져나올 엄두도 못내는 듯 했다.

 

잠시 뒤 저승사자는 무인도 해변에 박히듯 착지했다.

!

어찌나 세게 박히던지, 주변의 강력한 모래바람을 일으켜댔다. 착지한 그는 모래사장에 박힌 붉은 수정을 집어 들며 한숨을 쉬었다.

한발 늦었구나!’

그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과 젊은 무사로 보이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대들은 누구신가?”

저승사자는 물었다.

우리는 사정이 있어 같이 싸울 동료들을 모으기 위해 조선시대에서 왔소! 전 장영실이고 이쪽 청년은 홍길동이라 하오! 불구덩이가 된 광화문 일대를 날다가 번개인지 난기류에 휩쓸려 이곳에 오게 되었지요!”

세 명은 각자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된 거 서로 도움을 주기로 한다.

자네들은 이도가 보낸 자들이었군! 자네가 홍길동인가? 잘되었어. 혹시 나중에 손오공을 만난다면 그가 금고아를 뺏는지 물어봐줄 수 있는가? 뺏다면 그 방법 좀 물어봐 주시게나. 보다시피 나도 비슷한 문제로 골치가 아파서 말이야!”

, 근데 저 혹시, 그건 다른 문제 아닐까요? 살을 먼저...”

갑작스러운 질문에 길동은 난색을 표했다.

일단 보자, 현무님을 어서 깨워야겠군!”

저승사자는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무심한척 배 앞으로 갔다. 회복주문을 외우며 팔을 뻗었다. 잠시 뒤 선채의 상처와 구멍들은 사라지고 원래의 모양으로 복원되었다. 현무의 포효소리가 들려왔고, 다시 깨어났다.

너희들은 괜찮은 것이냐?”

현무는 영실과 길동에게 물었다. 영실은 방금 전 들은 얘기들을 간략하게 현무에게 전했다.

오랜만입니다. 현무님! 선체가 아주 멋져지셨군요!”

저승사자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여러 일이 있었지, 얘기하자면 길 것이야. 그런데, 정말 내가 알던 자네인가? 그동안 고생이 얼마나 심했기에, 자네 행색이 참으로... 갓은 뭘 그리 꽉 조였는가?”

현무는 앞에 서있는 저승사자의 예전 꽃미남이라 불리던 시절을 생각하며 잠시 탄식했다. 더부룩한 수염과 빵빵한 배에 묻혔는지, 예전 날카로운 턱선과 사늘한 눈빛의 호리호리한 모습은 온데 간 데 없었기에.

어찌되었건 현무님, 지금은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준서라는 자가 결국 마지막은 청와대로 향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통령도 준서의 눈엔 갑질러 중의 갑일 테니까요!”

저승사자는 현무에게 재촉했다.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듣도록 하지

문이 열리고 셋은 거북선에 올라탔다. 거북선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둥글게 항해하는가 싶더니 번개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거북선은 순식간에 광화문 광장 앞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배는 좀 특별했다. 한민족을 수호하는 사신 중 하나인 현무가 깃들어있는 만큼 신비한 능력들이 많았다. 그 중에 지금 발휘된 능력은 선체 내의 시간을 잠시 분리해 멈추는 것! 거북선은 순식간에 도착했지만 일행들은 아직 그 사이의 시간에 머물렀다. 갑작스레 만난 저승사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잠시지만 이야기를 듣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밀크셰이크다!”

길동의 입에서 배안의 창문에 보이는 바깥풍경을 보고 한마디 단어가 내뱉어졌다. 창문 아래의 풍경을 보고 이 단어가 튀어나온 자신이 얼떨떨했다.

생소해야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그립지만 뜻 모를 이 단어, 내 입으로 튀어나온 이 단어는 무어란 말인가?’

밀크셰이크~ 밀크셰이크~ 밀크, 밀크, 밀크셰이크~ 내가 좋아하는 밀크셰이크~나만 먹을꼬지롱? 누구도 안줄꺼에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 자신이 어느 가정 한 가운데에서 밀크셰이크를 흥얼거리며 장난치던 한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꿈처럼 그것도 역시나 안개 낀 장면이었다. 어쨌든, 거북선에서 내려다보는 밖은 시간격차 덕에 하늘의 구름과 바다 땅 이런 것들이 뒤틀리고 서로가 뒤섞여가는 모습이었다. 마치 거대한 밀크셰이크라도 만드는 마냥! 길동이 이렇게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을 무렵, 현무와 영실은 저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수정은 준서 그자가 폭주 전에 마지막으로 흘린 양심의 눈물 같은 것이겠군!”

현무가 말했다.

, 현무님, 그렇습니다. 이 수정을 그의 심장에 다시 꽂기만 하면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승사자가 대답했다.

그 자는 어떤 자였습니까?”

바깥구경을 마친 길동이 다가와서 물었다.

이제 그 자에 대해서 말을 해 보게나! 그래야 어떤 행보를 보일지 추측할 수 있을 테니!”

현무는 길동의 말에 거들어 물었다.

! 그리하지요. 그 자를 보게 된 건 지옥의 염라대왕님께서 보이콧 선언을 하시고 난 직후의 일이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이 행성 곳곳에 전체적으로 대대적인 전쟁을 겪으며 예전 군주왕정시대보다 복잡한 세상이 되었지요! 자유라는 명목 하에 전엔 상상도 하지 못할 풍요로움이 생겨났죠. 개개인의 사랑, 배려 이런 좋은 쪽은 물론이고, 시기, 질투, 욕망 같은 악함들도 늘어났습니다. 억눌렸던 판도라의 상자가 이 나라에서도 열린 셈이죠. 양적인 팽창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점점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갔지요.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믿고 따르는 절대자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같은 절대왕정시대의 잔재들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아 혼란은 더 가중된 상황이지요. 그 덕에 여유롭던 지옥행담당 저승사자들은 백년 사이에 예방관리라는 과중한 업무를 떠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전에 없던 능력들도 받았지만, 힘든 건, 말도 마십시요!”

에휴~

저승사자는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자네의 그 행색차림도 이해가 가는군!”

현무는 말했다. 저승사자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렇다. 저승사자는 고생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꽃미남에서 아재가 될 정도로! 우리 주변의 배불뚝이 아재들도 예전엔 꽃미남이 아니었을까? 아재스럽다, 한심하다 욕만 할 것이 아니다. 한번만이라도 야근에 회식에, 사회생활에 시달리는 그들을 안쓰럽게 쳐다봐주자!

 

다시 저승사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저승사자가 말한 대로 지옥의 일이 너무 많아진 것이다. 심지어 지금 지옥의 염라대왕이 보이콧 선언을 해버린 상황이다. 한가한 천당의 옥황상제가 편하게 보여서 심통이 난건지, 저승사자에게 공문을 보내왔다.

[지옥으로부터 전언-지옥의 인원이 꽉 차버렸습니다. 더 이상 받을 구멍이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정말 처리가 안 되는 존재가 아닌 이상 받지 않겠습니다. 정화의 검을 첨부해 드릴 테니, 적절한 인간에게 맡겨 개 쓰레기 같은 존재들이 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인간의 인생영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업그레이드 시켜드립니다. 메시지를 읽은 후 신청버튼을 눌러주십시오!]

더 피곤하게 생겼군!’

저승사자는 신청버튼을 누르며 예전이 좋았단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났다. 그리곤 그 검을 맡길 인간을 찾아다녔다. 얼마 후, 저승사자는 무법자처럼 도심 도로를 휘젓는 버스를 발견했다.

저건 뭐지?’

저승사자의 관심은 버스 쪽으로 갔다. 더 정확히는 버스기사에게로 흥미가 갔다.

저놈으로 할까?’

 

[속보입니다.]

저승사자가 지켜보고 있는 버스 안에는 라디오 방송이 나왔다.

[탈옥범 민은국을 공개 수배합니다. 실로 국민 가슴에 또 커다란 구멍을 내는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고 수감 중이던 민은국이 탈옥을 하여 도주 중입니다.]

승객들은 방송을 들을 여유 없이 몸을 휘청대며 소리를 질러댔다. 반면에, 버스기사는 이어폰을 끼며 음악에 따라 어깨를 들썩이며 입도 흥얼흥얼거렸다. 그 기사는 엑셀만을 신이 나서 밟아댔다.

[수차례 청문회 출석요구에 거절을 해오던 민씨는 결국 구치소에 큰 구멍을 내고 도주하였습니다. 이는 미리 계획된 것으로 보이며 관련 인사들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일관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에선 일부러 풀어준 것이 아니냔 의혹을 제기하고 항의 촛불시위를 확대해 나가겠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얼마가 지났을까?

어둑어둑한 방.

저승사자와 굵은 나무줄기에 손발이 묶여있는 한 인간이 기절해 있었다.

버스기사였다.

[~! ! ~! ! ... “도망가! 둘이 먼저, 어서!”...]

이건 혹시 이도가 말한 그 형제들인가? 혹시 모르니 따로 챙겨둬야겠군!’

아그작, 아그작, 쩝쩝. 쩝쩝...

저승사자는 한손에 든 과자봉지 속 내용물을 계속해서 입안으로 옮겨가며 영상하나를 보았다. 부스럭 소리에 인간이 정신을 차린 듯 했다. 저승사자는 영상을 주머니에 꾸겨 넣으며 인간에게 말을 걸었다.

일어났나, 강준서? 빨리도 일어났네.”

급하게 손가락의 과자 부스러기도 털어냈다. 인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승사자를 보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누구세요? 어떻게 내 이름을? 여긴 어디에요? 분명 운동장이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당신이 날 데려온 거요? 이 나무줄기는 또 뭐야? 근데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되는 거죠? 벌을 받는 건가요? 당신은 누군데요? 이봐요, 대답을 좀 해봐요!”

끊지 않으면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말 좀 그만해! 그만!”

저승사자는 짜증을 냈다.

말 엄청 많네~ 난 말 많은 놈 딱 질색인데... 수다가 거의 이도만큼이구만?”

저승사자는 진정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넌 사람들을 엄청 죽였더군! 희생자들은 다행히 지옥행 영혼들은 없었지만, 어쨌든 넌 큰 죄를 지어버렸어~! 너의 머릿속을 잠시 들여다 볼 것이다. 위에 보고해야하니!”

저승사자는 손을 인간의 머리 쪽으로 얹으려 팔을 뻗었다.

뭐야, 왜이래, 누군데 그래요? 뭐하려고요?”

인간이 겁을 먹은 듯 물었다.

내가 얘기 안했나? 난 저승사자. 한국지부 지옥행 담당이지. 그러나 걱정 안 해도 되! 당장 지옥으로는 안 보낼 거다! 그곳은 지금 인원초과라서 말이야. 널 보낼 자리도 없어. 어쨌든 지금은 염라대왕께선 아주 피곤해하시고 격노하셨지.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보고부터 할 영상이나 봐야겠다.”

저승사자가 팔을 마저 뻗어 인간의 머리 위에 얹으니 바닷물 속에서 그물에 낚여 올라오는 멸치 떼처럼 영상들이 꾸러미 채 건져 올라왔다. 인간은 정신을 잃지 않고 신기해 할 뿐이었다.

이게 뭐지? 이런 게 가능해?”

인간이 놀라 물었고 저승사자는 대답해주었다.

저승사자만의 능력이지! 정신을 잃고 잠들 줄 알았는데 꽤나 강한 정신력을 가졌나보구나! 어쨌든 훑어보겠노라~!”

공중에 떠있는 영상물 꾸러미를 양 손으로 쫙 펼쳐서 훑어보았다.

 

저승사자는 아까 잡아오기 직전의 상황으로 보이는 영상을 찾아냈다. 손가락을 한번 가져다 누르니 영상이 재생되었다.

[나는 버스운전기사다. 어느 화창한 봄날, 정류장에 버스를 멈췄을...]

, 이건 뭐야? 내가 주인공인 영화 같잖아~! 내레이션까지 내 목소리잖아!”

인간은 두 눈을 동그랗게 크게 뜨며 공중에 떠있는 그것들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것들인 것이 실감이 안 되는 눈치였다.

놀랐나? 너희 인간의 뇌는 너희들이 하는 행동하나하나를 자서전영상으로 만들어 놓고 있지~ 너희 인간들이 쓰는 컴퓨터의 백업을 하는 셈이야! 이 영상들은 그 복사본이라 할 수 있어!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보자고!”

영상은 한쪽 벽을 스크린삼아 플레이되었다. 말 그대로 한편의 단편영화였다.

 

나는 버스운전기사다. 어느 화창한 봄날, 정류장에 버스를 멈췄을 때였다. 작은 투명 창 사이로 내 자리로 주먹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왜 이러세요! 아 진짜! 하지마세요.”

주먹이 내 얼굴을 향해 계속해서 돌진해 왔다. 주먹이 몇 번 오고 간 자리엔, 이번엔 재빠른 발이 송곳이 되어 내 몸을 날카롭게 찌르려 돌진해 왔다. 내 몸은 잔뜩 움츠려들었다. 내 팔은 몇 분 동안 쉴 틈 없이 위아래를 오갔지만 내 얼굴과 몸은 뻘겋게 퍼렇게 점점 썩어갔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고. 왜 자꾸 나에게만...’

정말 울고 싶었다. 어릴 때 헤어져 흩어진 동생들도 생각이 났다.

애들은 잘 살고 있을까?’

사내는 뭔가에 열이 받아 있는 듯 했고, 마치 피니쉬 기술을 쓰기전의 흥분 가득한 프로레슬링선수처럼 시끄럽게 포효했다.

여기 좀 도와주세요! 이 사람 좀 말려주세요!”

소리치며 도움을 청했지만 직육면체 공간 속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를 좀처럼 듣지 못했다. 날카로운 발놀림에 고개가 저절로 돌려져 플라스틱 막 밖의 사람들의 공간을 보게 되었다. 순간 그곳은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온한 세계처럼 보였다. 그냥 이 상황이 빨리 끝나서 다시 출발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 몇몇의 눈빛은 이런 신호를 보내왔다.

쳐다보면 뭐하게?’

결국 버스는 다음 장소로 출발하지 못했다.

 

이 시점부터 다소 지루해졌다. 저승사자는 영상 쪽으로 팔을 뻗었다. 복수를 시작했던 오늘 그 시각까지의 영상까지 돌려버렸다. 빨리 감기가 되는 영상들만 봐도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린 놈뿐만이 아니라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사람들까지 복수의 대상으로 두었던 듯 보였다. 재취업 실패와 정신적 이상에 아내와 아이마저 이놈을 떠난 듯 했다. 저승사자는 인간에게 연민을 느꼈다.

불쌍한 인간! 어찌 이리 되었단 말인가? 이놈은 모든 걸 잃고 술에 절어 살다가 우연히 마주친 그 가해자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눈이 뒤집힌 것이었다. 저럴 수 있지!’

저승사자는 복수의 시작점까지 돌렸다. 팔을 내리자 영상은 다시 재생되었다.

 

놈이 드디어 내 앞에 나타났다. 전에 몰던 37번에서 55번으로 바꾼 지 열흘 만이었다. 놈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흥분되기 시작했다. 놈은 아이와 아내가 함께였다.

세 명이요!”

[다인승입니다.]

그놈은 날 알아보지 못하고 카드를 찍고 지나갔다. 내 자리는 철로 만든 쉽게 범접할 수 없을 막으로 채워져 날 방해할 요소는 사라졌다. 놈을 포함해 승객들은 일반적인 것보다 오바스러운 내 운전석을 그리 신경쓰진 않는 눈치였다. 역시 저 승객이란 놈들은 지들일 아니면 무신경한 놈들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못 참을 정도로 덥거나 춥지 않은 이상 신경쓰지 않는 창문들도 뻑뻑하게, 쉽게 안 열리는 상태였다. 버스를 이제 정류장에 세우지 않았다. 난 이어폰을 끼고 어릴 때 봤던 tv만화 영광의 레이서 오프닝 송을 반복재생으로 해놓고 따라 불렀다. 액셀은 있는 힘껏 밟으며 레이스를 즐겼다. 사람들은 기겁을 하며 나에게 둘러싸인 철문을 힘껏 두들기며 나에게 멈추라 소리쳤다. 참으로 적극적인 모습들이었다. 예전과 다르게...

! 이거 완전 부산행 좀비들이 따로 없구만!’

...내 마음 뭉게구름 솜사탕같아~!...

어깨를 들썩이며 귓가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내 입고리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더욱 힘차게 액셀을 밟았다. 버스를 이러저리 요동치며 몰아보니, 이미 버스는 슈퍼유니콘으로 변신해 달려 나를 더욱 더 흥분케 했다.

부스터~! 최고점까지 카운트다운 시작! 가자, 슈퍼유니콘~!”

난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외쳐대며 액셀을 밟아댔다. 한참을 달리다가 눈에 보이는 학교 운동장으로 버스를 몰아갔다. 차를 멈춰 세우고 뒤를 돌아보니 사람들은 거의 실신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마침 가까이에 엎어져있는 그놈을 발견했다. 그놈만 끌고 나와 던져놓고, 전에 설치했던 가스의 밸브를 열어놓고 버스 문을 잠갔다. 얼마 되지 않아 창문은 뿌옇게 변해갔다.

 

정신을 차린 그놈이 울먹이며 외쳐댔었다.

, 왜 그러세요. 저희한테.”

이제 와서 약한 척 하는 꼴이란! 난 웃으며 말했다.

, 그냥 열 받잖아!”

라이터 하나를 꺼내 놈의 아내와 딸이 타고 있는, 여태까지 내가 몰던 버스 밑으로 던졌다.

안 돼!”

그놈은 소리쳤지만 이미 버스는 폭발음과 함께 검은 그을음이 되어갔다. 폭발음과 함께 사람들의 짧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잘 짜인 오케스트라합창단의 합창 같았다.

아름답구만!”

난 입맛을 한번 다셨다. 그놈은 정신없이 울어재끼며 비명을 외쳐댔고, 난 악마를 소탕한 용사마냥 보람된 웃음도 지어보였다.

이 새꺄~, 이 악마새끼, 너 뭐하는 짓이야 이게~! 이게 뭐야! 저 사람들 살려내, 살려내라고!”

그 놈이 내 멱살을 잡으며 날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그토록 내가 바라던 이 남자의 반응이었다. 놈의 손은 떨리고 있었고 전혀 위협적이지 못했다. 전과 달리...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날 건드렸어? 버스기사라고 내가 만만했니? 만만하면 니 열 받는 거, 막 화풀이해도 된다든? 네가 아무 상관없는 날 밟은 덕에, 난 직장도 잃고 가족도 다 잃었거든! 사람하나 그렇게 만들었으면 너도 같이 추락해야 이치에 맞는 거잖아 그치? 난 이치에 맞게 널 심판했을 뿐이야! 안 그래? 그러니까 저 사람들, 그리고 네 가족이 죽은 것도, 다 너 때문이에요, !”

힘없이 쓰러지는 그놈을 패대기치고 난 유유히 밖으로 걸어갔다.

흐음, 별거 아니네! 새끼! 난 깜방에나 들어가서 푹 좀 쉬어야겠다. 졸립네...’

놈을 스윽 한번 쳐다보고는 곧 나를 데리러 올 시끄러운 불빛의 경찰차 행렬을 기다리면서 나는 지루한 하품을 길게 뽑아냈다.

 

저승사자도 하품을 하며 리모컨으로 tv를 끄듯 팔을 뻗어 영상들을 정지시켰다.

볼만 했네~”

너무 단순한 구조라고, 또 복수 준비과정이 너무 과했다고 말했다. 저승사자는 마치 영화평론을 하듯이 중얼거리며 상부에 보고할 준비를 시작했다.

뭐 영화라도 한편 보셨어?”

인간은 저승사자의 태도가 불쾌했다.

그래, 너도 이 일 오래 해봐~ 평론가 다 된다니까? , 니들 말로하면 인생평론가랄까?”

저승사자는 웃으며 그 영상을 상부에 전송시켰다. 나머지 영상꾸러미는 작은 조각들이 나뉘어가며 사라져버렸다.

이제 곧, 명령이 올 거다. 너에 대한 처분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언 메시지가 떴다.

[담당 저승사자의 제량에 맡기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확실히 처리요망!]

“... 이란다!”

놈에게 메시지를 읽어주었다.

, 처리? 난 죽는 건가요?”

인간이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저승사자는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놈이, 그런 큰 죄를 지어놓고 멀쩡하길 바라는 건가?’

저승사자는 인간이 듣고 싶을 대답은 하지 않았다.

 

딱딱한 말투로 이어나갔다.

세계는 부당한 갑들이 만연해 있어 선한 영혼들까지도 악함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 나라도 이미 심각한 수준이지! 은밀하게 사회전반에서 말이야! 네가 복수를 했던 그 사내도 아마 희생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너처럼! 악에 바친 니들 놈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꼴이지. 복수를 원한다면 본질적인 놈들을 상대로 해야 하지 않겠나?”

인간은 부들부들 떨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겐 선택지 하나를 주겠다.”

저승사자는 검 두 자루를 꺼내들며 말했다.

자 선택하라! 하나는 이 검! 소멸의 검으로 소멸 당할지 아니면 이 검! 정화의 검으로 갑들을 정화시켜 나갈지!”

인간은 저승사자의 제안을 듣자,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입술을 꽉 깨물며,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찌나 꽉 깨물었는지 오도도독 기분 나쁜 소리가 날 정도였다. 그의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한번 해볼게요, 제가 잘할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그리고 한 가지 부탁드릴게 있는데요.”

인간은 처음의 그 수다스러움은 온데 간 데 없고 무거운 짐을 어깨에 하나 더 얹은 짐꾼마냥 한층 가라앉아 보였다. 순간적으로 붉은 눈이 번쩍했다가 사라졌다. 저승사자는 그것을 보진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일이 성공한다 해도 너의 처분은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다. 이 소멸의 검을 쓸지, 아니면 어떻게 할지 그때 가서 결정을 할 것이다!”

저승사자는 인간을 노려봤다.

하늘 위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행운을 비마, 이것들을 가지고 열심히 해 보거라! 네가 말한 건 이번 한번만 들어주마!”

그는 말하며 준서에게 여러 가지를 건네주었다. 그것들은 저승사자에 버금 갈 여러 능력들이 있고, 날 수도 있는 투명망토와 정화의 검이었다. 그리고는 빛을 발산시키며 하늘 위로 올라갔다.

다시 말하지만, 넌 이미 크나큰 죄를 지은 죄인이다! 조금이라도 속죄를 할 수 있는 길을 걷도록!”

 

저승사자는 영상 속, 남자모습을 떠올렸다.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환하게 웃는 모습. 놈이었다. 날 이렇게 만들고 웃음이 나오나보다. 놈은 아이와 손을 꼭 잡고 예전에 내가 몰던 37번 버스를 탔다. 그 모습을 난 멀찌감치 서서 가만히 옅은 미소로 바라만 볼 뿐...]

섬뜩했다. 인간의 얼굴에서 심판자의 눈빛을 보았기에.

이도가 찾던 삼형제 중 한명일 수도 있겠군. 그런데 그것치곤, 너무 포악하지 않은가? 그래도 뭐 그런 부탁을 하는 것 보니 괜찮겠지...’

저승사자는 내심 안심하며 올라갔다.

 

인간은 눈부심에 눈을 감았다 떴다. 결박은 풀렸고 그 운동장으로 돌아왔다. 버스는 그을음이 되기 전, 기절한 승객들을 태운 채 멀쩡해있었다. 그 앞에서 놈은 울부짖는 상태 그대로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놈의 옷은 버스기사 옷이 입혀져 있었다. 시내를 폭주한 버스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도착한 경찰들은 허둥지둥 뒷북을 치기 시작했다. 물론 범인은 그 자리에 있지만 투명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자리를 뜬 것과 다름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버스 옆에서 쓰러져 흐느끼는 남자를 범인으로 오해해 그를 포박했다.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니라고! 미진이랑, 내 딸도 저기 있다니까! 내 딸~! 그놈이 저 사람들 죽였다고! 내가 아니라고!”

죽긴 누가 죽어? 인마! 이놈 이거, 대낮부터 술 처먹었나? 헛소리나 찍찍하네...”

경찰은 그를 포박한 채 끌고 가 경찰차에 태웠다.

내가 안 그랬어! 그놈이 불 싸질렀다고!”

, 대체 불은 누가 질렀다고 그래? 조용히 해 새꺄!”

남자의 눈엔 아직도 운동장의 버스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남자는 울부짖었지만 경찰들은 그의 말 같은 건 듣지 않고 제압할 뿐이었다.

딴사람은 몰라도 넌, 그 지옥에서 당분간 절망을 좀 맛봐야 되!’

준서는 멀리서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뒤이어 출동한 구조대 차들이 요란스럽게 도착했고, 버스안의 갇힌 승객들을 차례차례 구조했다. 버스 안 기절했던 승객들이 기침을 하며 나오는 모습을 본 준서는 한숨을 내쉬며 사라졌다.

일단 이걸로 된 거겠지... , 세상 시끄럽게 하는 놈들부터 혼내주러 가볼까?’

인간은 청문회장으로 날아갔고, 곧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런 한심한 개, 돼지만도 못한, 버러지 놈들!...”

 

어서, 녀석을 진정시켜야겠군!”

현무는 말했다.

말씀대로 저희 전하께서 말씀하신 삼형제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군요. 혹시 그게 아니어도 잘만 다듬으면 훌륭한 인재가 될 수도 있으니, 꼭 데려가야겠소!”

영실도 말했다.

대감님, 도술도 가르쳐야겠어요, 정신을 수양해 다시는 폭주하는 일 없도록!”

길동도 거들었다.

, 자네처럼 말인가? 자네부터 꾸준히 하게나. 그때 고주망태와 함께 난동피던 걸 생각하면 어휴, 그때 전하와 구미호가 없었으면 어찌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싫네 그려.”

길동의 말에 영실은 장난 섞인 어투로 길동에게 손사래를 쳤다.

대감님도 참, 예전일은 왜 또 꺼내시고 그러세요.”

길동은 멋쩍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시간의 멈춤은 풀려 밀크셰이크는 흩어지고, 일행은 청와대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준서는 과연 청와대로 향했을까? 일단 거북선의 뱃머리는 그곳을 향해서 전진해 갔다.

 

4. 준상

 

또롱! 또롱!

임금의 해시계에서 반짝이던 네 불빛중 하나가 마침내 중앙에 도착했다.

드디어 셋이 모였나보군!

임금은 조용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쪽방으로 들어갔고, 앞에 서있던 젊은 내관이 그를 따라나섰다. 그곳엔 석판하나가 윙윙 소리를 내며 반짝였다. 영실과 길동을 보내준 석판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길동과 영실대감이 해냈어. 역시! 이제 나 이도, 세종대왕님이 나설 차례군! 이 몸이 빠질 수 있나?”

한 번 더 미소를 지어보이며 분주하게 이곳저곳의 서책들을 뒤져보았다. 따라온 내관도 동시에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겼다.

할바마마, 기뻐하십시오! 소자, 또 한걸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사옵니다!”

한 서책을 펼치니 반짝이는 금색의 마패가 나타났다.

영실이 그자가 말한 것이 이것이로군!”

임금은 그 서책과 마패를 집어 들고 석판을 향해 한마디 외치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과인이 명한다. 짐을 그곳으로 보내 주거라!”

석판에서 나온 빛이 방을 감싸고 바람도 일어났다.

가십시다! 김내관!”

석판은 임금과 김내관을 어디론가 보내주었고, 곧 빛도 바람도 사라졌다. 그런데 빛과 바람이 채 사라지기 전, 쪽방구석의 또 다른 문이 열리며 두 여인이 뛰쳐 들어왔다.

보명과 초희였다.

지금이라면 따라갈 수 있을 거예요. 서둘러요.”

그들은 사라진 임금을 뒤따라 석판을 통과해갔다. 바람이 지나간 방에는 종이들의 흩날림이 요란했다. 그러나 자리를 지키는 나이든 내관의 기침소리가 그것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게 막아섰다. 내관인 그는 표정만큼은 성곽을 지키는 장군의 것이었다.

 

거북선 일행이 광화문광장 하늘에 도착했다. 저승사자의 제안으로 뱃머리는 청와대로 향했다. 광화문을 지나 바로 뒤 근정전 위를 지날 때였다.

!

크게 한번 소리가 나며 뭔가에 부딪혀 진동이 일었다. 누군가 포물선을 그려가며 날아와 거북선 지붕위로 안착한 것이었다. 얇고 매끈한,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납작한 나무 봉 같은 것들을 들고 있는 사내였다.

이런! 강준서가 우릴 먼저 찾아온 건가? 왜지? 우리가 접근하는 걸 알았나?’

갑자기 들은 여러 불안한 생각에 저승사자는 당황되었다.

누군가 선체 위에 올라타 있는데, 준서는 아닌 듯 보인다. 청룡과 백호의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에 내가 말한 그자인 것 같구나.”

현무는 선체 위의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일단, 보는 눈들이 있을 수 있으니 위로 올라가야겠구나!”

현무는 공중으로 떠올라 구름 속으로 숨어들었다. 선체 위에는 이제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미주야, 너는 날 어디까지 데려가려는 거야?’

지붕위의 남자는 한숨을 길게 한번 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떨결에 시작한 여정과 고통스럽던 고된 훈련이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갔다. 당장이라도 관두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나날이었다. 그렇지만 그 여정 끝엔 그녀의 모습이 있을 희망으로 여기까지 왔다.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를 이 여정의 고단함도 날 멈추지는 못해!’

남자는 들고 있는 납작한 봉들을 보며 잠시 지난날을 생각했다.

 

잠시 이 남자의 과거를 따라가 보자.

 

무너져 내려앉는 어두운 터널을 사내가 빠져나온다. 그 사내는 검이라기엔 조금은 두터운 방망이를 등에 멘 채, 커다란 동전 하나를 들고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동전이라기엔 큰 원반에 가까운 크기였다. 사내는 발에 쇠고랑을 차고 있어서 그런지 더욱 더 숨이 차 보였다.

!

모래바람이 살짝 일었다. 그 사내가 가지고 나온 묵직한 동전을 내던지며 노인에게 말했다.

가지고 나오라는 게, 이거, 맞죠? 제가 뭐, 짐꾼이에요? 자꾸, 자꾸 뭘 또, 가져다 달래요? 이제 가르쳐 주세요, 제국익문산지, 뭔지 하는 곳으로 좀, 데려다 달라고요 할아범! 그나저나, 날 죽일려고, 그런 거 맞죠? 아니고서야 저런, 저런 괴물 소굴 안으로 사람을, 이 꼴을 하고, 보낼 리가 없어, 아 진짜, 진짜 죽을 뻔 했네.”

헐떡거리며 토하듯이 말을 내뱉는 사내를 보면서 노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제법 테가 나는구나, 처음에 왔을 땐 그런 애송이가 따로 없었는데, 그래 가르쳐주마! 그곳으로 가는 걸 도와주마!”

그제야 사내는 털썩 주저앉으며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테는 무슨, 이놈의 영감탱이, 진작 그럴 것이지!”

하고는 곧바로 기절했지만 말이다.

 

미주야!”

, 또 그 꿈... 얼마가 지난거야?’

사내는 소리치며 눈을 떴다.

지금 몇 개월째일까?’

문득 바깥세상의 시간이 궁금해졌다. 그 국정농단인지 뭔지 때문에 시끄러웠던 거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이젠 좀, 조용해졌을까? 그날 밤은 정말 이상한 밤이었어.’

사내는 그간 일을 정리하듯,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그날 밤, 군중 속에서 난, 광화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희들의 무지와, 무관심을 탓하라! 너희들의 안일함을 탓하라! 원망만, 절망만 하던 너희들의 자세를 탓하라! 너희들의 늦은 후회를 탓하라! 이 버러지 같은 놈들아!...”

“...심판과 이 나라를 재건하는 것은 이제 시작인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너희들의 몫이다!...”

문장들이 내 가슴으로 공중에서 내리꽂혔다. 집에 돌아온, 화살을 맞은 듯 내 몸뚱이는 침대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애를 써 봐도 잠은 이루지 못했다.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이런 상관도 없는 게 날 괴롭히는 거야?’

결국 뜬눈으로 일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나는 검안사로서 근무하는 안과의 토요일 근무가 끝나면 종종 광화문 광장을 거닐 곤 했다. 청계천을 걷고 광화문 광장을 걷다보면 보이는, 그리고 2, 3층 되는 청계천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올라앉아 거리야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생산라인의 기계들처럼, 같은 말 같은 행동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그녀, 미주가 무척이나 사랑했던 야경이라 그런지, 이제는 내게도 소중하게 다가왔다. 그녀와 함께일 때는 거리의 사람들, 경복궁, 고궁박물관, 미술관들이 전부 우릴 위해 마련된 뮤지컬 무대인 듯 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겨울의 하얀 눈과 여름의 축축한 장맛비마저 우리를 축복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 시간들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우리의 무대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나만 홀로 두고서...

그때였다. 난 그녀가 다시 나타날까, 홀린 듯 토요일이면 내 발걸음은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 그 거리는 그이후로 온갖 집회와 몸싸움들로 더렵혀졌다. 왜적의 침입으로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선조일당들을 보며 궁을 불사질렀던 임진년의 백성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암튼 거리는 점점 더 시끄러워졌다. 거리에 내리던 눈과 비도 사라지고 지저분한 미세먼지만 거리에 흩날릴 뿐이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왜 날 이렇게, 거리를 헤매이게 두었을까?

그녀는 왜, 그녀의 보물을 이렇게 더럽혀지도록 내팽개쳤을까?

대체 왜?...

 

뭔 사건이 또 터졌나보다.

그녀의, 우리의 보물에 촛불들이 가세해 망치고 있지 않은가? 난 사회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관심 없었다. 단지, 저 소음들이 그녀가 남긴 보물을 망치고 있는, 그 현상들에 짜증날 뿐이었다. 촛불들은 3년 전 노란불빛을 시작으로 했었다가 잠시 주춤했었다. 그런데 요새 누군가 거리에 기름을 뿌렸는지 그곳엔 촛불들로 다시 붉은바다를 이루었다.

또 시끄러워졌군!’

그 거리가 시끄러워진 것은 내 미간을 잔뜩 찌푸리게 만들었다.

아 또 뭔 일인데?’

턱을 괴며 창가에 비친 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녀와의 추억이 깃든, 내가 앉은 커피숍 3층으로 사람들이 한명 두 명 늘어나기 시작했다. 점점 시끄러워져 난 이어폰을 끼고 창밖으로 고개를 고정시켰다. 그러다 잠시 잠이 들었나보다. 얼마가 지났는지 누군가 내 귓불을 잡아당겼다.

! 뭐에요!”

순간, 마감시간에 정리하는 종업원인줄 알았던 나는 미안함 반 짜증 반으로 조심스레 소리쳤다. 그러나 종업원은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로 봐선 마감시간도 아니었다. 안경이 벗겨졌는지, 내 실눈에 들어오는 흐릿한 실루엣은 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두터운 볼록렌즈에 의지하던 내 두 눈은 안경 없인 도저히 초점 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 누구지?’

내가 안경을 찾아보기도 전에 그 실루엣은 말없이 내 손을 이끌고 카페를 나서 거리로 나섰다. 급하게 나오느라 내가 앉았던 테이블이 쓰러졌고, 곧이어 옆 테이블과 커피들까지 쏟아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야 이, 뭐야?”

근처 사람들이 따지는 소리에 나는 흐릿한 눈으로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었다.

! 이 여자는 뭔데?’

당혹감이 날 감쌌지만 왠지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그저 뭔지 모를 포근함, 내지는 설렘이란 감정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날 잡아끄는 여자의 촉감이 미주의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기에.

미주라 생각하면 되지 뭐!’ 안경이 없는 뿌연 이순간이 다행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안경이 있으면 뭐하랴! 이 환상만 깨지겠지!’

 

그녀의 손에 이끌려 들어온 거리의 행렬 속은 좁디좁은 통로를 걷는 것 같았다. 발을 잘못 놀리면 한순간에 무너질 도미노들이었다. 다행히 걸음들은 빠르지 않았다. 흐린 눈으로 앞 사람들 뒤통수를 보고 있자면, 언뜻 안개 속 촛불을 든 성직자들의 행렬 속 같았다. 성스러운 음악까지 흐르는 느낌도 들었다. 전에 뭔 의미인지 통 알 수 없다고 미주가 투덜대던, 청계천 끝 쪽의 다슬기 조형물을 지났다. 교보타워를 지나고, 이순신장군과 세종대왕 동상들도 지나 광화문으로 향했다. 두 동상 사이에는 방송국 연말시상식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레이저줄기들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걸어가면서 그 불빛들을 따라 밤하늘을 봤다. 얼핏 배처럼 생긴 무언가가 공중 저 멀리에서 떠 있는 듯 했다.

별거 다 만들어놨군!’

그것 말고도 무언가를 패러디를 한 건지, 조형물들이 많이 보였다. 실루엣이 내 손을 계속 끌고 있어 훑고 지날 뿐이었다.

 

광화문 앞까지 왔을 때였다. 번개가 한번 치며, 공중에서 목소리 하나가 울리기 시작했다.

들어라, 대한민국 민초들이여!”

고개를 광화문 하늘 쪽으로 보니, 누군가를 업은 채, 공중에 서 있는 한 연설가를 발견했다. 그는 신기하게도 공중에 떠 있었다. 한동안 내 가슴에 꽂힐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해, 난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하늘도 내 마음을 아는지 우렁찬 번개를 한번 기침 내뱉듯 쏟아냈다. 이어서 그는 소환사처럼 누군가를 불러내고 땅에 떨어트렸다. 주위의 몇몇 사람들은 그 떨어진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밟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 연설가이자 소환사는 밟히는 사람들을 다시 데리고 번개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심판과 이 나라를 재건하는 것은 이제 시작인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너희들의 몫이다!”

사람들은 사라진 연설가의 마지막 말에 다시 이성을 되찾았다. 다시 본래의 평화로운 촛불시위의 모습을 갖춰 청와대쪽으로 행진했다. 순간 멍해있던 나도 정신을 차렸다. 뿌옇던 시야가 밝아졌다. 신기하게도 안경은 내 얼굴, 코와 귀에 안착되어 있었다.

! 분명 안경은...’

곧 누군지 모를 실루엣의 존재가 잡아 이끌던 내손엔, 그 손대신 웬 한지로 되어 있는 봉투 하나가 쥐어져 있다는 걸 발견했었다. 열어보니 하얀 한지뿐 아무 글자도 없었다. 봉투의 한쪽면의 聖聰補佐, 나에겐 읽기 버거운 한자로 된 인장이 찍혀있었다. 또 접합부분의 촛농으로 만든 꽃무늬장식하나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또다시 시야가 흐려졌고 정신이 몽롱해져서 쓰러질 것 같아 불안해졌다. 사람들을 헤치며, 집으로 돌아와 침대로 피신하듯 바싹 엎드렸다. 아침햇살에 눈을 뜬 내 손은 쥐어진 한지봉투를 그때까지도 놓지 못했다.

꿈이 아니었어, 이건 대체 뭘까? 그 사람은 누구였지? 아무리 생각해도, 미주가 맞았던 것 같은데...’

그땐,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건지, 확신이 들었던 건지, 나도 모른다. 어쨌든...

 

난 무언가에 이끌리듯 모니터 앞에 앉았다. 전날 밤 일이 너무 이상했기에 인터넷엔 나올 것 같진 않지만 일말의 기대감으로 검색창을 채워봤다.

비밀편지, 투명편지, 투명한 글씨, 비밀 메시지...”

별의별 검색어를 다 쳐보았지만 전부 허사였다.

, 뭐야, 이런 거 갑자기 주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고?”

짜증 섞인 막막함에 옆에 둔 한지를 마구 꾸겨서 방구석으로 던져버렸다. 다시 그렇게 검색어를 만들어가며 한참을 씨름했다. 결국 또 성질이 나서 엉덩이를 더 이상 의자에 붙일 수가 없었다.

아 몰라, 저딴 거 알게 뭐야, 태워버려야지 그냥! !”

박차고 일어나 한지뭉치를 들고 라이터를 켰다. 그러나 좀처럼 탈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 너도 질기네 질겨, 징허다!”

한지뭉치에 괜한 화풀이를 하며 창고에 있던 향초를 꺼내왔다. 예전에 생일선물로 미주가 준 향초였다.

이럴 때 쓰려고 모셔둔 게 아니었는데...’

향초에 불을 붙이고 한지뭉치를 들이댔지만 역시나, 타지는 않았다.

이건 뭔데 안타?”

오랫동안 대고 있어도 소용없었다. 또다시 난, 제풀에 꺾여 그 뭉치를 집어던졌다. 그때였다. 구겨진 한지 속에 뭔가 검은 무늬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한지를 펼쳐보았다. 여러 글씨들이 복잡하게 나타났다. 고대 상형문자인지 외국어인지, 뭔지 모를 글씨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메꿔갔다.

 

난 중앙의 황금색으로 된 한글 문장들만 알아볼 뿐이었다. 독도의 청룡과 강화도 전등사의 백호의 힘을 구하여 고주망태 영감께 가라는 내용이었다.

청룡? 백호? 신화얘기야 뭐야? 근데 나한테 뭘, 어떻게 구하라는 거야? 고주망태 영감은 또 뭐지? 이름이 고주망태야?’

곧이어 봉투에 찍힌 도장의 네 글자가 눈에 또 들어왔다. 팔자에도 없는 옥편을 뒤져보니 성총보좌라 읽혔고 바로 검색을 해보았다. 이건 조선말 고종이 만든 비밀조직 제국익문사에서 사용하던 화학비사법 방식으로 쓴 편지에 찍은 국새인장이었다.

이게 사실이면 누가 왜, 나한테 이걸...’

인터넷에선 조직이 고종퇴위 후 해체되어 사라졌다는 것 이상은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특이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꽤 지난, 아주 작게 난 기사였다. 자신이 제국익문사 일원이라고 주장한, 그리 대수롭지 않은 내용이었다. 이런 건 별로 관심조차 받지 못했을 텐데, 작지만 메이저 신문에 실렸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기사에 적힌 주소로 그 주인공의 집을 찾아갔다. 어느 숲에 있는 집이었다. 자물쇠도 전등도 집 주인도 없었다.

왠지 낯이 익는 집인데, 뭐 그럴 리 있겠는가?

어쨌든, 사람의 손을 그리워하는 두터운 먼지들과 거미가 왔다간 흔적들만 가득했다. 어두운 집안을 휴대폰 불빛을 의지해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한쪽 벽면에 구한말에나 있었을 법한 낡은 사진들이 여럿 붙여있었다. 먼지로 가득 찬 한줄기 빛을 의지해 둘러보던 중, 낯익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였다. 사라진 그녀, 미주었다. 한 남자와 다정히 연인의 모습으로 찍은 것도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새하얀 드레스를, 남자는 조선시대 왕이 입었을 만한 용포를 입고 있었다. 일부가 색이 바래, 남자의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알아보진 못할 것이었다. 짜증이 확 났다.

기껏, 남자가 바뀐 거였어?’

사진 속의 색 바랜 남자에게 질투심이 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된 건지 의아해 했어야 할 상황인데, 질투와 시기어린 감정들이 날 감쌌던 것 같다. 그 사진을 갈기갈기 찢고 던지며 얼굴이 홍당무가 되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곤 금방 다시 후회했지만 말이다. 그 조각들을 다시 주섬주섬 주워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것 참, 여기 오는 게 아니었는데...’

점점 빠져 나올 수 없는 늪에 발을 담그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 어떠랴...

난 미주만 다시 만날 수 있으면 되! 분명 한지에 나타난 대로 따라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

어떠한 힘에 이끌리듯 벽에 걸린 나머지 사진들도 챙겨 서둘러 그 집을 나왔다.

일단 갈 수 있을 데까지 가보는 거야. 만나서 자초지종을 좀 들어봐야겠어, 미주한테! 일단 독도부터 가보자!’

난 마음과는 다르게 내 입 꼬리가 점점 올라가는 걸 느꼈다. 드디어, 드디어 내 자신에게 떳떳한 목표가 생겼다. 아무 생각 안하고 달려갈 지점이 생긴 것이다. 그녀가 사라진 후, 난 지금까지 삶의 의욕을 잃고 지냈다. 마치 어린 시절의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보름달의 그날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녀 덕분에 다시 힘을 낼 수가 있었는데 그녀 또한 사라져버렸기에. 직장생활도 싫었다. 매일 똑같은 업무에, 매일 똑같은 내 앞에 펼쳐지는 수간호사의 진상 라이브에, 모든 것이 아주 넌덜머리가 났다. 왜 넌덜머리가 났는지 지금부터 설명해본다.

 

동료 간호사들은 발에 땀나도록 업무에 몰두하는데 수간호사란 고것은 그렇지가 못하다. 지 간식거리만, 지 가족사만 지 연애사업만 챙겨가며 전화질, 카톡질, 화장질, 지각질을 밥 먹듯이 해대는 게 일상이다. 바쁘다고 달라지진 않는다.

혹시 사람을 괴롭히러 온 요괴인가?’

사람이라면 절대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내 머리로는...

어쨌든 헤아릴 수도 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고구마를 멕이듯 숨 막히게 하는 존재였다. 그러다 눈치가 보이는가 싶으면 검안실장인 나와 원장에게 굽신굽신 고개를 쳐 숙여댔다.

헤헤헷!”

기분 나쁜 웃음을 날리며 과자 나부랭이들을 내밀기도 했다. 이쯤 되니 과자들이 요괴가 주는 저주의 독극물로 다가왔다. 너무 싫었다. 한편으론, 내가 한 인간에게 이렇게나 혐오를 느낄 수도 있는지도 깨달은 기회였다. 근데, 진짜 요괴일지도... 어쨌든 같이 하루, 아니 반나절만 지내보면 내 심정을 알게 될 것이다. 데스크에서 졸고 나자빠지는 고것의 머리통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어질 것이다.

 

아니 그럼, 호되게 혼을 내거나 말을 해보면 되지 않냐고?

그리고 원장한테 말하던지 하면 되지 않냐고?

당연히 해봤지, 직원 휴게실로 따로 불러서 여럿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일을 좀 하시라...

진지하게도, 언성 높이면서도, 몇번 말해봤지. 원래 난 나서는 성격이 아니라 그냥 신경 끄려고 했지만 막내간호사가 거의 나갈 각을 세우고 있어서 한번은 나서 봐야겠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 말에 일단 울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울며불며 휴지로 눈을 뻘겋게 비비더니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지가 땡땡이치는 것 때문에 다 힘든 것 다 안다고 하더라. 근데 원장도 아닌 내 까짓것은 신경 쓰지 말라더라. 결국 난 헛짓거릴 하게 된 셈이었고, 고것의 무기인 가식적인 착한 척은 계속 되었다. 결국 성실하게 일을 잘하던 막내 간호사 한명이 뛰쳐나갔다. 그만둘까, 어쩔까? 갈팡질팡하길래 내가 나가서 다른 곳으로 구하라고 독려도 했다. 어차피 말뿐인 놈과 게으론 것이 바뀔 일이 만무했기에...

원장에게 몇 달에 걸쳐 말을 해봐도 주위를 주겠단 말뿐 달라지지 않았다. 뭐 갑자기 고것이 수간호사 대접을 못 받아서 불쌍하다는 둥, 이딴 식으로 입을 씨부리지 않나, 그리고 송방망이 처분뿐이었다. 처분은 그저 반차 삭감정도였다.

! 원장 이놈도 병신이구나!’

난 확신했다.

둘 다 병신 아니면 싸이코패스가 확실하구나!’

용어가 의학적으로 맞든 안 맞든 정상은 아니었다. 그 후 내 자리에서 가만히 보니, 둘 또라이들끼리 짝짝꿍이 잘 맞는 것 같았다. 어쨌든 원장은 또 한명의 애꿎은 일반인을 잡아다가 수간호사의 비어있는 하수인자리를 기어이 채웠다. 그 아줌마 둘은 좀처럼 반항을 하거나, 항의하는 일 없는 수간호사의 충실한 하수인들이었다.

! 짤릴 일 없이 저런 하수인을 둘이나 거느린다면 그야말로 꿈의 직장 아닌가?’

머리가 빈 고것에겐 공무원이 부럽지 않은 자리였을 것이다. 구멍가게만한 동네 의원급의 수간호사 자리란 것이 그리도 대단한 건지 그제야 알았다. 10년 동안 몰랐던 내가 한심할 정도로...

 

이제 더 이상 그곳에 정이 안 갔다. 겉으론 웃으며 모두를 대했지만,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다른 병원으로도 가기는 싫었다. 이 일을 10년 정도 하고보니 그 병원이 그 병원이었기에. 지금 병원은 정도가 심했을 뿐, 다른 곳도 상태가 마찬가지라는 건 진작에 알아버렸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환경이나 다른 직업으로 가고 싶었다. 그럼 조금이라도 의욕이라는 게 살아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직에 도움이 된다는 평생교육사나 직업상담사,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따려 공부했고 실습만 남았다. 그리고 취미로 미술이나 사진도 배워봤고, 모임에도 나가 여럿 사람들과도 어울려봤다. 그러나 월급이란 악마는 매일 피곤함이란 힘으로 내 몸을 밑으로 짓눌렀다.

저딴 거 신경 안 쓰고 그냥 다니면 되지 머! 어차피 딴 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 똑같애! 여긴 그래도 월급이 그럭저럭 괜찮잖아! 돈 모일 때까지 조금만 더 참자? 돈 없는데 나가봤자 거렁뱅이 말고 뭐 할 건데?”

결국 난 악마의 저주에 홀려 끝내 퇴사라는 넘사벽 담장 밑에서 고꾸라졌다. 저만치 담장 넘어 보이는 이민이란 꽃망울을 잡으려 팔도 뻗어 보았지만 또 다시 헛짓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저주를 단박에 끊어버릴 힘을 얻었다. 퇴사란 검을 멋지게 뽑아 들 명분을 찾은 것이다.

미주가 찾으러 가야지, 이딴 놈들이랑 어울리고 뭐하는 거야?’

검을 멋지게 휘두르며 그녀 곁으로 갈 생각에 내 마음은 설렜다.

 

, 병원에 출근해서 사표를 낸다거나, 휴가신청을 한다거나 하는 귀찮은 짓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대신 독도로 가는 빠른 방법을 찾는다던가, 배편, 버스 편을 찾는 데만 생각을 몰두하였다. 아마 병원엔 한바탕 난리가 났었을 것이다. 다음날 내가 맡을 검사 예약환자들이 열댓 명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어떤가? 이미 그런 건 내 일이 아니었다. 또 대충 잘 돌아가겠지.’

단지 하수인들에게 조금 미안할 따름이었다. 근데 뭐 그 놈들도 지들이 자처한 일이었다. 이미 예전에 나도 많이 겪은 일이었다. 원장은 뭐 대수롭지도 않을 일일 것이다. 내가 보아 온 원장들은 겉으론 심각한 척 하지만, 실제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했다. 전부터 보아온 바론, 한 직원이 갑자기 나가면 나머지 직원들만 힘들어 죽어나갈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수간호사 고것은 계속해서 딴 짓하거나 농땡이 칠 테고, 두 하수인만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닐 것이다.

다들 그러다가 못 참으면 나가거나 적응해가겠지. 내가 했던 것처럼...’

 

어쨌든 버스를 타고 동해고속버스터미널을 거쳐 묵호항으로 갔고, 또다시 배를 타고 울릉도까지 갔다. 울릉도로 가는 배는 아침밖에 없었다. 다행히 자정이 조금 지난 새벽에 출발을 해 와서, 제 시각에 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못 간다!

하늘이 경고를 보내는 것처럼 강한 폭풍우가 울릉도를 덮쳐 배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독도로 가는 배가 있는 후포항에 가봤지만 기다리란 말뿐이었다. 나는 도통 진정되지 않았다. 왠지 지금 바로 가야할 것만 같은, 어디서 오는지 모를 불안감이 나를 덮쳐왔다. 그렇지만 갈 방법이 없어 막막한 마음에 난 우비를 입고 항구 주변을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그때였다.

내 잠바 안주머니에서 약한 푸른색 형광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주머니엔 그 한지가 들어있을 터였다. 한지에 무언가 또 변화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이것을 볼 수 있는 자여! 독도방향으로 서서 한지를 쫙 펴고 주문을 외치시오! 청룡신께 도착을 할지니, -좌청룡, 그대의 비늘로 황금호랑이를 맞이하라!-]

한지를 펼쳐보니 빼곡했던 검은색 글자들 일부분이 이번에는 중앙 황금색 글씨들 왼편으로 모여들어 문장들을 완성시켰다. 색도 검은색에서 푸른색으로 점차 띄어져갔다.

이걸 외치라는 건가?’

혹시 누가 보면 창피할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폭풍우가 와서 그런지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래, 뭐 해보지 뭐.’

난 한지를 쫙 펴고 독도가 건너편에 있을 바다를 향해 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좌청룡, 그대의 비늘로 황금호랑이를 맞이하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더 큰소리로 외쳤다.

좌청룡! 그대의 비늘로! 황금호랑이를 맞이하라!”

이번에는 처음과 달리 사방으로 울릴 정도로 소리가 컸다.

그 순간!

가뜩이나 거센 바람이 더욱 더 세차게 불어왔다. 바람은 내 몸을 날려버릴 정도로 거세게 몰아쳐댔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얇고 기다란 회오리줄기가 어느새 나에게 다가와, 내게서 한지를 빼앗고, 내 몸을 공중에 띄었다. 회오리 줄기는 점점 내 팔 길이보다 두꺼워졌다. 회오리 줄기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난,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한지를 잡으려 하염없이 팔과 다리를 휘저었다. 야속하게도 한지는 내게서 저만치 떨어져 춤을 추듯 화려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다음 순간, 가능하다면 내 눈을 비벼보고 싶었다. 그 한지는 푸른색을 띄며 새의 깃털인지 물고기의 비늘인지, 형태가 바뀌어갔다. 그리곤 점점 다가와 내 몸을 감싸버렸다. 날 어디론가 데려가는 듯 느껴졌는데, 순간 나는 정신을 잠시 잃었었나보다.

 

눈을 뜬 순간, 난 어느 공중에 떠 있었다. 정신을 차린 동시에 밑으로 하염없이 추락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추락하는 몸은 어느 순간 멈췄다. 아직 공중이었다. 현기증이 났지만,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날 진정시켰다. 정신을 다잡고 밑을 내려다봤다. 그곳엔 개미떼처럼 줄지어 흙을 쌓는 사람들의 행렬이 보였다. 그 중 눈에 띄는 건 모습들이 비슷한 장정 셋이었다. 형제처럼 보이는 그들은 사람들을 독려해가며 앞장서서 흙을 쌓았다. 쌓여있는 흙들은 점점 성곽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왜 이런 모습들이 나타나지?’

난 지상으로 내려가고자 발버둥을 쳐보았다. 얼마 후, 하얗게 배경이 없는 곳으로 공간이 바뀌었다.

하얗고 밝게 눈부신, 아무것도 없는 배경이 펼쳐졌다. 건물의 안인지 밖인지 알 수 없는 배경에 형제로 보이는, 포졸복장의 세 명이 저만치 또 보였다. 그들 사이로 희미하게 나무기둥이 하나 보였다. 신학만, 신덕만, 신강만. 그들 중 한명이 붓으로 기둥에 이름을 쓰며 나머지 둘에게 훈계를 놓고 있었다.

니들은 여지꺼정 글도 안 떼고, 이름도 못쓰고 뭐했다냐? 저 양키 놈들이 쳐들어온 건 순전히 니놈들 탓이랑께? 니들처럼 나라의 젊은 것들이 글도 모르고 무식쟁이 티를 팍팍 내니께 저것들이 무시해가꼬 이런 사단이 난거 아녀! 아무리 천하거나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났어도 글공부는 해야하는 것이여! 안되겄어, 이참에 고향 내려가면 글공부 아주 호되게 시킬 것이니께, 그런 줄 알어 들!”

시무룩하게 나머지 둘은 그 대답대신 고향의 어머니가 보고 싶다 말하며 조용히 팔로 눈물을 훔쳤다.

형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이었다. 형도 나와 막내한테 헤어지기 전까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귀가 닳도록 말했었는데...

 

다음 순간, 난 다시 이동해 갔다. 이번엔 내가 사는 시대의 광화문 바로 위 공중이었다. 전의 촛불바다는 사라지고 옅은 안개가 깔려있었다. 한 무리가 광화문 안쪽에 있는 것이 보였다. 안개 때문에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기는 힘들었다. 그 무리 중 한명은 머리 여럿 달린 괴상한 짐승을 끌고 있었고, 또 한사람은 뭔가 광채가 나는 것들을 양손에 들고 있었다. 사극에서나 볼 법한 복장을 한 이들도 몇 명 보였다. 그들 옆으로는 빛줄기 하나가 어디선가 내려왔다. 빛줄기를 따라 위를 보니 나보다 높은 하늘엔 전에 봤던 배가 떠 있었다. 옅은 안개 속에도 거북선은 그 모습을 선명히 드러냈다. 그것도 잠시, 안개는 이 모든 걸 지워나갔고, 나의 현실의 눈은 떠졌다. 정말 이상한 꿈들이었어, 게다가 한꺼번에 연달아 꾸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예전에도 비슷한 꿈들을 꾼 적이 있었다. 분명 방금 것들과 비슷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확실치는 않았다.

 

주위를 보니 신학만, 신덕만, 신강만. 방금 전 꿈에서 봤던 세로로 써진, 삐뚤빼뚤 써내려간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이건? 방금 꿈, 이었을 텐데?’

난 어안이 벙벙한 채로, 한동안 바라만 보았다.

일어났느냐!”

웬 중후한 목소리가 울리듯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실체는 없었다.

그대가 누워있는 곳은 전등사의 대웅보전 안이다! 꿈에서 장면들을 여럿 보았겠지? 그 꿈들의 정체가 궁금하다면 짐을 챙겨 마니산의 참성단으로 오거라!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울림은 사라졌다.

환청인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나한테! 여긴 어디야? 울릉도에도 이런 절이 있나?’

여러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계속해서 망치로 내려찍듯 두들겨 팼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에, 문이 열렸고 문 앞에 한 스님이 나타났다. 그 스님은 말없이 가방하나와 열쇠하나를 놓고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뭐냐고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가방은 두 가방을 바느질로 꿰어 합쳐놓은 신기하게 생긴 모양이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울릉도는 아닌 듯 했다. 따가운 햇살에 손으로 눈을 가려가며, 찡그린 눈으로 여기저기 둘러보니 강화도 전등사란 푯말이 보였다.

분명 동해, 그것도 울릉도였는데...’

분명 푸른빛을 내는 무언가에 쌓였고, 그 뒤론 기억이 안 났다. 아니, 기억이 없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하긴 뭐, 이 여정에 상식적인 게 어디 있었나? 이번엔 또 뭐, 마니산 참성단? 그래 가준다. ! 미주만 만나게 해준다면!’

그렇게 누가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멋대로 난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 목소리가 하라는 대로 짐들을 들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어우, 뭐 이렇게 무거워?’

 

땀범벅이 된 몸으로 한참을 마니산에 올랐다. 참성단 입구에 가보니 단단한 철망의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그 갑자기 나타난, 말없던 스님이 두고 간 열쇠를 넣어보니 자물쇠는 풀렸다. 문을 열고 계단을 또 올라가야했다.

, 왜 하필 등산이야!”

평소 등산이라곤 해본 적 없는 나는 이미 땀으로 옷을 빨고도 남았다. 노역장의 노예처럼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계단을 후들후들 오르기 시작했다.

콰쾅!

아이구야~!”

문은 저절로 다시 닫히고 자물쇠가 다시 채워져 다른 등산객의 입장을 막았다. 그 바람에 놀란 내 풀린 다리들은 개다리춤에 가까운 트위스트를 춰댔다.

야이 씨~ 깜짝이야! 놀랬자너인마아! 그러지 말!!”

겨우 후들거리는 다리를 잡고선 괜한 화풀이를 문 쪽으로 퍼부었다. 그리곤 별 수 없이 다시 계단을 올랐다.

이거 완전 수그리당당 숭당당이라네? 어후 힘들어!”

 

마니산 정상에, 드디어 참성단이란 곳 맨 위쪽에 올랐다. 돌로 쌓은 편평한 참성단 위에 머리가 무성한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그곳은 산 정상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바람 한 점 없었다. 전등사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리라.

할아버지가 절, 절 부르신 거예요?”

아직 등산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채 가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노인은 그것을 다시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일연이가 잘 건네줬나 보군. 그래, 내가 불렀지, 내 이름은 고주망태, 자네 이름이 준상이 맞는가?”

노인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난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어떤 분이냐고 물었다. 그 꿈들에 대해서도 말해달라고 했다. 노인은 지금은 대답해 줄 시간이 없다면서 되레 나에게 물었다. 아니 질문이라기보다,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자네, 미주라는 자를 알고 있겠지? 그녀와 만나고 싶은가? 제국익문사라는 집단에 대해서는 들어보았는가? 그 미주라는 자는 그곳 소속이네, 그곳으로 가고 싶다면, 나의 지도를 받아 수련을 해야 할 것이야! 함께 갈 텐가? 자네는 선택할 수 있지. 나는 그대의 선택이...”

이 할아범은 뭐지? 뭔데 날 알고, 미주도 알지? 가만, 그 한지에서도 분명 고주망태라 그랬는데?’

그 꿈들과 아직 생소한 제국익문사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근데 뭐, 이제 와서 어쩔 텐가? 불어오는 바람에 또다시 몸을 맡길 수밖에...

난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노인은 내가 광화문에서 받았던 한지와 같은걸 꺼내더니 쫙 펴서 큰 날개를 퍼덕이는 새를 만들어냈다. 몸집이 제법 컸다. 노인과 함께 새 등에 오르니, 어디선가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한지는 진짜 새 마냥 울어댔다. 곧 바람을 타며 비행을 시작했고 이곳 숲으로 데려다 주었다. 도착하자마자 숨 고를 틈 없이, 난 노인의 지도하에 수련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휘두르지도 않을 무거운 방망이를 등에 지어야했고, 옛 죄수들이나 찰 법한 무거운 쇠고랑을 발목에 차야했다. 잠잘 때도 풀지 못했다. 계속해서 뛰어야 할 때가 많았고, 눈을 감고 잠들지 않는 상태로 온종일 있어야 할 때도 많았다.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날로 더해갔다. 그러나 미주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지금까지 버텨왔다. 이 감정이 배신감, 증오 같은 것인지 그리움인 건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이제 일어났느냐?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더구나.”

노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노인은 내가 꼬박 삼일을 쓰러져 잠들어있었다 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하나만 남았는데 그것은 아주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다고 했다.

 

일단 저녁부터 먹자구나! 미호가 저녁을 차리고 기다리고 있어, 어서 내려 오거라.”

노인은 말을 마치고 먼저 주방으로 돌아갔다.

뭐 또 어떻게든 되겠지. 그나저나 미호 할머니의 음식솜씨는 항상 정말 일품이란 말이야!’

부엌으로 갔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냄새에 잠시 복잡한 생각은 던져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좋았던 건, 저녁식사 때만큼은 등에 메고 있는 붕대로 감겨있는 방망이를 등에서 뗄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다리 위에는 올려놔야하지만 말이다. 찌개 안에 보글보글 움직이는 두부들 사이로 보이는 달래들과 고기 살들이 내 배를 유혹했다. 밥상엔 싱싱한 야채들과 간장들로 버무린 묵이 할아범 앞에 큼직하게 놓여졌다. 할아범은 항상, 밥 대신 묵만 드셨다. 아삭아삭한 콩나물, 무김치, 배추김치들도 보였고 비오는 날 막걸리가 생각나는 파전, 치즈계란말이, 두부김치들도 보였다. 그리고 멸치볶음이며, 생선구이며, 잔 반찬들도 푸짐하게 펼쳐져 있었다. 말 그대로 상다리가 휘어지다 못해 뿌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여기 온 후로 항상 그래왔지만 이번에도 다 먹기 전까진 못 일어나는 이 엄청난 식탁에 도전하기가 매번 겁이 났다. 꼬르륵, 눈치 없는 배가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오는 바람에 난 자리에 앉아 도전을 시작했다. 꿀잠 뒤라 그런지, 마지막을 예감해서 그런지 무척 맛있었다. 고봉으로 쌓은 밥그릇을 다 해치워버리고 행복한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배가 불러오며 도전은 마침내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첫날처럼 할머니께 맛있다고 말하며 밥그릇을 들어 올리거나 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밥 남았는데 더 줄까? 더 먹어! 장정이니 많이 먹어야징!”

할머니의 거대한 고봉밥이 몇 번이고 다시 쌓였던 첫날의 악몽은 한번으로 족했다. 그러니 깔끔한 한마디면 충분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마지막일 것 같아 더욱 짧게만 느껴졌던 행복한 저녁식사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노인은 날 데리고 숲 안 어디론가 향했다. 노인은 뒤로 떨어져 오라 명령조로 이야기 했고, 나는 순순히 말을 따랐다. 어둠은 유난히 짙게 숲에 깔렸다. 점점 어두워졌고, 어느 순간부터 보이는 거라곤 노인이 들고 있는 횃불이 전부였다. 달빛을 가리는 덩치 큰 나무들이 울창해진 깊숙한 숲으로 들어왔을 때부터였다. 노인이 들고 있는 횃불은 점차 시퍼런 색이 되더니 노인이 마치 그 횃불이 된 것처럼 보였다. 너무 어두워서 착시현상까지 보이는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눈을 몇 번 깜박거려 봐도, 얼굴을 흔들어대 봐도 정신이 몽롱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어지럽네, 할아버지 어디까지가요? ?”

소리쳐 봐도 앞서가는 노인은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갔다. 어느덧 숲의 끝에 다다르자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숲이 끝난 곳엔 넓은 공터가 펼쳐져 있었고 멀리 집 한 채가 보였다. 노인은 모습을 감췄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냐고 소리를 쳐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뭐하는 거예요? 어디에요?”

저길 가라는 건가?’

달빛에 비춰지는 집은 어딘가 음산했다.

, 유치하게 왜이래요? , 뭐하는 거예요? , 담력! , 후울련하는거에요? , 하아나도 안 무서, 섭거든요? 어우 씨~”

나는 대답 없을 말을 더듬더듬 허공에 쏘아대다가 돌부린지 뭔가에 걸려 넘어질 뻔도 했다. 넘어지지 않으려 팔을 쫙 펴가며, 온 몸을 위 아래로 휘저어댔다.

이것 참, 이번엔 달밤에 앗싸 호랑나비야?’

조심조심 걸음을 이어나갔다.

? 이 집이 왜 여기...?’

가까이에서 집을 보니, 그 집이었다. 미주의 사진을 봤던 그 집! 그냥 비슷한 집인가? 그러고 보니 그 집도 이렇게 숲속에 있었는데... 내가 다가서자, 집 안에서 시퍼런 불빛이 새어나왔고, 더욱 음산해졌다. 방금 숲에서 봤던 불빛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그 말이 맞을 것이다. 문이 저절로 활짝 열리고 안쪽으로 세차게 부는 바람에 난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바닥도 벽도 천장도 아무것도 없었다. 시퍼런 가스로 가득 찬 행성 안이 이와 같을까?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날 감싸기라도 하듯, 날 공중에 붕 뜨게 만들었다. , 촛불처럼 생긴 불씨가 눈앞에 나타났다. 불씨는 점차 커지더니 괴수의 모양으로 변해갔다. 그러더니 내 얼굴 가까이로 포효하듯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내 양쪽 손은 얼굴을 가리고 내 입은 비명 지르며, 공중이지만 내 몸뚱이는 주저앉았다.

다음순간,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할아범이 배를 잡고 껄껄껄 웃고 있었다.

뭐하는 거예요? 또 사람 갖고 장난쳐요?”

나는 따지듯 물었다.

그래, 사람 갖고 장난치지, 도깨비 갖고 장난치랴? 너무 재밌어~! 오랜만에 이런 장난! 자넨 정말 매번 반응이 좋아서 좋아! 전에도 그런 애가 한명 있었는데, 네가 딱 그 꼴이구나! 그 애도 반응이 참 좋았어, , 가만, 한명이 아니었던가? 얼굴이 흡사한 두 명이 차례로 왔던가? 그러고 보니 자네도 비슷하게 생긴 듯 허이... 이도는 참으로, 어떻게 저런 애들로만...”

할아범은 멈추지 않고 계속 웃어댔다.

아이 뭐 어쩌라구요~!”

지긋지긋했다.

저놈의 장난! 얼마나 장난을 처 온 거야? 으휴, 내가 전생에 뭔 죄를 졌길래...”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당해온 할아범의 장난질에 이젠 넌덜머리가 났다. 곧 시퍼런 가스행성은 노인과 함께 사라졌다.

원래의 방이 돌아오고 난 바닥에 엎어졌다. 방에는 둥그런 원안에 꽉 차게 한 송이 꽃으로 된 문양이 내 앞에 큼직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문양은 한지에 그려져 있던 것과 비슷해보였다. 소환수라도 나올 기세였다.

뭐야? 마법진이라도 되는 거야? , 주문이라도 외쳐볼까?’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우막싸라무! 나와라, 번개전사 그랑...”

!

뭐하나? 자리에 앉아!”

문양 건너편에 번개전사 대신 할아범이 나타났다. 그리곤 어울리지도 않게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출석부를 펼치며 떠드는 아이 혼내듯 말했다.

저놈의 영감탱, 마지막엔 꼭 저런다니까!’

일어나 두 팔 벌려 번개전사를 불러내는데 실패한 나는, 민망함에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난 문양을 보며 앉았다.

 

노인은 내가 전등사에서 가져온 가방을 가져왔다. 두 개의 것을 합친 형태의 가방, 또 봐도 누가 그랬는지 신기한 형태였다. 하나에서는 울릉도에서 나를 감싸던 거대한 푸른색 비늘과 또 하나에서는 날카롭게 생긴 동물의 송곳니를 꺼내들었다.

이거, 기억나나? 물론 기억 안 나겠지...”

두 가지를 문양 양 옆으로 하나씩 두고 노인은 내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이제부터 그대가 궁금해 할 것들을 말해줄 것이야! 조금 긴 이야기가 될 테니 잘 듣게!”

노인은 정말 길고 긴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었다. 머나먼 우주에서 달과 바이칼 호수를 통해 지구로 왔다는 다소 황당한 민족의 기원부터 시작을 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수호신, 오늘날 귀신이라 치부되는 여러 종족들의 이야기들을 다소 두서없이 전해주었다. 미래에 우리민족의 씨를 포함한 여러 민족 씨들이 사라지고, 동시에 이 행성이 전멸위기에 빠진다는, 아직 실감이 안가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이 이야기를 왜 저에게 하시는 거죠? 그리고, 애초에 제가 이 훈련을 왜 받아야 되는 거구요. 저는 단지 미주를...”

이야기를 듣는 중에 난 새삼스레 물었다.

알고 있네, 자네는 단지 미주와 만나고 싶은 거라는 걸. 단지 자네에게 미주와 자네의 위치를 설명해주는 것일 뿐일세! 그대들이 다시 민족의 수장으로서 나설지 말지는 그대들의 선택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노인은 내 반응을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 바로 답을 해주었다.

, 수장이라고요?”

나는 놀라서 또 물었다.

일단 내 이야기를 들어 보게나! 자네! 예전부터 반복해서 꾸던 꿈들이 몇 가지 있지? 지난번 전등사에서 일어날 때 꿨던 꿈도 포함해서 말이야!”

노인은 그 꿈들이 전부 나의 전생이라 말했다. 엄밀히 말해, 전생보다 전승에 가깝다 했다. 민족을 지키던 단군의 세 아들의 영혼이 계속해서 민족의 운명을 가를 때마다 전승되어 나타났다는 것이다. 때론 형제로, 때론 친구로 혹은 때론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적으로서 말이다.

뿔뿔이 흩어진 우리 형제들도 마찬가지란 건가?’

그럼 마지막 꿈은 뭐죠? 삼형제가 아니던데요? 전승이라 하기엔, 너무 지금과 가까운,”

그건 자네형제의 모습들일 것일세. 아직 그 꿈은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지만. 자네의 선택에 따라 그대로 일 수도, 바뀔 수도...”

그 꿈에서 형과 나 그리고 막내도 있었다고?’

머리가 복잡해져갔다.

뭐야, 이미 거스를 수 없는 건가? 미주가 아니었더라도 이미 난...’

난 운명을 믿으며 살진 않았다. 그러나 운명은 날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이다. 늪에 빠진 발은 더욱 깊숙이 들어가 이제 내 몸을 끌고 내려갔다. 그나마 그곳에 미주가 있을 거란 사실이 작은 위로가 되었다. 영감의 입을 통해서는 미주에 대해선 듣지 않았다. 직접 만나서,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로 들을 것이다. 정말 만나기만 하면 따지듯이...

 

정말 귀찮았다. 난 원래 나서길 정말 싫어하고, 나설 줄도 모른다. 그런 날 운명나부랭이는 왜 이렇게 피곤하게 하는지 원. 나는 한숨을 한번 길게 쉬며 운명을 받아들이는 노력을 해보기로 했다. 노인의 말은 그 뒤로도 한참을 이어졌다.

저것들은 할아범이 말한 청룡과 백호의 힘인가요?”

노인과 나 사이 양옆으로 놓인 물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 저것들을 이용해 자네의 힘을 발산시킬 것이네!”

노인은 나에게 다가와 다리의 쇠고랑을 풀어주었다. 등에 맨 붕대로 싼 방망이를 양손으로 들고 문양 중앙에 앉으라 했다. 나는 노인의 말대로 등에 메었던 방망이를 들고 문양 중앙에 앉았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노인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고주망태로 불리는 도깨비지!”

고주망태 영감이 도깨비라... 뭐 인간이 아닌 줄은 알았으니까. 묵만 드실 때부터 알아봤어.

그리고 그간의 일로 이젠 이쯤이야 대수롭지도 않았다.

본래 우리 도깨비들은 주위의 물건들을 본 따 각자의 힘을 담아 사용해오고 있지! 원래의 모습은 커다란 방망이지만 각자의 개성과 능력, 애착과 밀착정도에 따라 다른 형태가 되지. 자네의 그 방망이도 마찬가지일세! 이젠 그대도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 때가 온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자네!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야! 명심하게!”

노인은 방법을 알려주었고, 나는 노인의 안내에 따랐다. 그 방망이를 양반다리에 올려놓은 뒤 눈을 감고 노인이 알려준 대로 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도록 지금까지 했던 생각을 비우는 훈련에서처럼 집중하였다. 한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다. 때는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흘러가고 나서였다. 거센 비바람이 느껴졌다. 분명 실내였을 터, 그런 게 올 리가 없었다.

또 저 영감이 장난을 치는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자칫 숨이 멎을 뻔 했다. 내 밑으로 작게 보이는 무인도를 빼면 짙고 푸른 바다가 무서울 정도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위로는 압도적인 크기의 푸른색의 용이 날 응시하고 있었다.

청룡!

그 앞에서 말 한마디 할 엄두는커녕,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들고 있는 방망이를 꽉 잡은 채, 정신을 붙잡는 것만으로도 온 힘이 들어갔다.

그대가 나를 깨우는 주문을 외웠는가?”

용이 나에게 물었다. 울릉도에서 외쳤던 주문이 생각났다. 여전히 말이 입 밖으로 뱉어지지 않아 고개만 가까스로 끄덕였다.

, 보아하니 고주망태 영감한테 다녀왔군, 그대가 삼형제의 힘을 전승한 자 중 한명이란 말이지? 그녀의 피가 흐르긴 하나보군!”

나에게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다짜고짜 청룡은 나를 시험하겠다며 돌진해왔다. 나는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눈을 감아버렸다. 다음 순간 눈을 찡그리며 떴을 때 내 모습은 청룡을 들고 있던 방망이로 막아서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정신 차리지 못할까!”

청룡은 나에게 훈계라도 하듯 소리치며 잠시 뒤로 물러나 다시 돌격준비를 했다. 나는 여전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다. 청룡과 부딪히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방망이를 움켜쥔 양손도 덜덜 떨렸다. 청룡은 다시 돌진해왔다. 처음과 달리 내 손은 방망이를 놓치고 청룡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바다위에 떠 있던 나는 무인도 해변에 떨어졌다. 무인도는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그때였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흰색호랑이 한 마리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땅이라면 안전할 줄 알았나?”

이건 뭐야, 청룡 다음엔 백호야?’

다행인지 저 멀리 바다의 청룡은 잠시 숨고르기를 하듯 그대로 있었다. 다음 순간 내 몸은 저만치 날아가 고꾸라졌다.

한눈 팔지 마라! 너에겐 그럴 여유는 없다!”

으르렁거리며 걸걸한 목소리로 백호가 말했다. 고주망태 할아범이 수련을 해준 덕에, 내 몸은 확실히 전보단 가벼워지고 빨라진 게 느껴졌다.

아무리그래도 그렇지, 저런 존재들을 내가 어떻게 이겨?’

막막했다. 모래사장과 바다 사이를 하염없이 달려 도망칠 뿐이었다.

꽈광!

어느 순간 내 눈에 번쩍하고 별이 보이는 듯 했다. 분명 끝없이 펼쳐진 해변인데 지금 난 무언가에 부딪힌 것이었다.

영원히 도망만 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청룡과 백호는 땅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나를 응시하며 합창을 하듯 동시에 말했다. 서라운드 입체음향마냥 바람과 진동을 일으키며 울려왔다.

, 그래도 계속 도망가는 체력과 끈기하나는 일품이군!”

백호는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딴 것도 능력이라고 가지고 있는가? 한심한 놈!”

청룡도 혀를 차댔다.

더 볼 것도 없다! 일찍 끝을 보자!”

청룡과 백호는 갑자기 빠르게 서로에게 돌진해갔다. 둘이 부딪힌 순간, 요란한 번개가 굵직하고 선명한 형광색 선 하나를 그으며 내리쳤다. 잠시 뿌연 연기가 일어났다가 다시 걷혔다.

 

걷혀지는 연기 속 사이로 공중에 떠있는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 사내는 푸른 갑옷을 입고 검 한 자루를 손에 들고 있었다. 푸른 갑옷은 청룡비늘로, 하얀색의 검 한 자루는 백호의 이빨로 만들어진 듯 했다. 신기한 건 그 자의 얼굴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바로 거울 속에서 본 내 얼굴이었다.

난 어둠 속에 머물고 있는 너의 또 다른 자아이다! 그대여! 무얼 망설이고 있는가? 무엇이 두려워 그리도 잔뜩 주눅이 들었는가? 도망은 쳐도 되지만, 그리 도망만 쳐서야 되겠는가? 남이 규정한 자신에게서 이제 벗어나와! 그게 힘들면 이제 그만 전승의 운명에서 널, 처단하겠다! 그리고 이제 내가 널 대신에 몸을 차지할 것이다!”

내 얼굴을 한 그자는 검 끝을 나에게 향하게 한 채 청룡과 백호가 그랬던 것처럼 돌진해왔다. 내 눈은 돌진하는 그를 지켜보기만 할뿐, 내 손과 팔, 다리, 내 몸 어느 곳 하나에도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단지, 내 손과 다리는 덜덜덜 작은 떨림을 계속 이어갈 뿐이었다. 그가 뻗은 검 끝은 내 심장을 관통해갔다.

, 이제 죽는 거구나.’

뭔가 어째 허망한 인생이라 생각이 들었다. 짧은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내 눈 앞에 수많은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런 게 주마등, 이란 건가?’

어째, 좋은 기억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폭행으로 인하여 형이 나와 동생을 감싸려 새우등을 해가며 대신 맞는 장면 같은 우울한 장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각자 다른 곳으로 흩어져서 소식이 끊겼다. 내 인생에의 폭행은 그 후에도 이어졌다. 대학까지 보내주는 대외적으론 친절한 양부모였지만 실상은 화풀이대상이었다. 나란 존재는 열 받으면 밟고 짜증나서 때리고 화난다고 집어던지는 집안의 화분만도 못한 존재였다. 인간에게 저항조차 않는 화분 속 식물처럼 난 화내는 법조차 몰랐다. 난 짐승처럼 맞고 또 맞는 게 당연한 것처럼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 나 같은 놈은 죽어서 사라져도 상관없는 거겠지. 날 사랑해줬던 미주마저도, 날 조금씩이나마 양지로 이끌던 그녀마저도 떠났으니. 이젠 누구하나 슬퍼할 사람이 없을 테니까. 주마등조차 떠나버리고 내 주위엔 어둠만 짙어져갔다. 내 몸이 점점 더, 밑으로 꺼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일어나렴, ...준상아, ...준상아,.. 일어나야지?...”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낯설지 않은, 그리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눈을 떴다. 엄마였다. 기억속의 모습은 지금까지 떠오르지 않았었는데... 앞에 있는 사람은 확실히 엄마였다. 반가움과 그동안의 서러움, 버림받아 생긴 증오감, 여러 감정들이 올라와 날 울보로 바꿔버렸다.

엄마, 엄마, 어엄마~”

나는 어린아이처럼 울어댔다. 엄마는 나를 꼬오옥 품에 안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아가, 우리 이쁜 아기, 힘들었지? 그동안... 엄마가 미안해... 우리 아기들 고생시키고... 엄마가 미안해...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엄마가 미안해... 미안해...”

엄마는 나와 같이 울어주었다. 그렇게 한동안 우리 둘은 그렇게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니 한결 후련해졌다. 어느새 짙은 어둠은 푸른색 공간으로 바뀌었다.

더 이상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충분히 사랑받은 존재란 걸 알려주셨으니까, 울지 마세요 이제.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저에겐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까요, 엄마만큼은 아니겠지만 절 많이 사랑해주던 사람을 찾으러 가야 되거든요! 고맙습니다. 사랑해주셔서...”

나의 말에 엄마는 날 한번 안아주시고는 나지막하게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한마디 남기고서 희미해져갔다. 나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 전에 내 양손이 의식보다 먼저 돌아와 있는 듯 했다. 점점 몸 깊숙이 들어가려는 검을 막아선 것이다. 의식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양손이 검을 잡고 버티고 있었다.

이제, 누구한테도 굴하지 않아!’

짐승의 포효를 하듯 소리치며 내 심장에 박힌 검을 마저 빼들었다. 내 몸 위의 사내는 다시 집어넣으려 힘을 주는 듯 했으나 이번에는 내 힘이 더 강했다. 난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출혈도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심지어 칼날을 쥐고 있는 양손에도...

나는 칼날 째로 그 사내를 들어 올려 멀리 던져버렸다. 생각보다 훨씬 멀리 날아갔다. 그 사내는 쌓여있는 모래더미에 부딪혀 모래바람을 일으켰다.

이제야 겨뤄볼만 하겠군! 좋다! 너의 무기를 잡아라! 너의 힘을 보여다오!”

사내는 모래바람 사이를 걸어오며 말했다. 땅에 널브러진 방망이가 눈에 띄었다. 난 그것을 잡고 그 사내에게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몸도 방망이도 전보다 훨씬 가벼웠다.

이렇게 뭉퉁한 방망이라도 저놈의 칼을 가르며 저놈에게 다다를 수 있으리라.

해보는 거야!’

이때부터 나의 눈은 힘을 발산할 때면 황금색 빛을 띄었던 것 같다. 사내가 빠르게 날 향해 달려왔다. 나도 질세라 빠른 속도로 그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이 상쾌하기까지 했다. 내 몸 주위로 황금빛 섬광이 일어나는 게 느껴졌고 내 마음 속에 자신감이 넘쳐났다. 누구한테도 이젠, 질 것 같지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쓰러질 순 없어!”

소리치며 그 사내를 향해 방망이를 휘둘렀다. 쌓여져 있던 붕대가 풀리며 방망이의 실체가 들어나며 사내의 몸을 갈라버렸다. 그 사내는 사라져 먼지바람이 되었다. 방망이는 다시 붕대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클날뻔 했네, 어후, 싸움은 힘들어!”

내 한마디를 끝으로 황금빛 섬광은 사라지고 눈도 평범한 갈색으로 돌아왔다.

 

번개가 또 한번 쳤다. 바다위로 청룡이, 모래사장엔 백호가 다시 나타났다.

겨우 시험에 통과했군! 그래봤자 아직 넌 애송이에 불과해! 고주망태가 알려준 정신수련은 계속 해야 할 것이야. 자만하거나 나태해지는 일이 있어선 아니 될 것이야! 잡생각이나 나쁜 마음이 또 커지는 날엔 우린 다시 널 시험에 들게 할 것이다!”

청룡의 이 한마디를 끝으로 청룡과 백호는 들고 있던 방망이로 스며들었다. 방망이 주위로 하얀 섬광이 일어나며 내 눈을 감겼다. 다시 눈을 뜬 순간, 나는 다시 문양의 중앙으로 돌아와 있었고, 난 곧 이 힘을 완성시켰다.

 

5. 스키아!

 

어디지? 사라졌나요?”

길동은 아무도 없는 화면을 보며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행방을 몰라 당황한 듯,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거북선 안 일행에겐 적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긴장의 상황이었다.

피이이잉!

요란한 소리와 함께 준상의 모습이 선체 안에서 퍼즐조각들이 맞춰지듯 드러났다. 일행들은 뒷걸음치며 경계했다.

, 저기, 저기, 긴장할 것 없어요. , 여러분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제가 제국익문사란 조직에 다가가야 되거든요. 고주망태 할아범에게 듣기론, 여러분들이 절 도와줄 수 있다 해서요. 그래서 결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불쑥... 죄송해요!”

준상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마쳤다.

다들 경계를 풀어도 되네! 그건 그렇고 자네, 그 얘긴 나중에 하고 우릴 좀 먼저 도와주어야겠네. 우리가 사정이 생겨서 말이야. 아마도 자네가 찾는 제국익문사와도 관련된 일이야! 도와주겠나?”

현무의 설명에 준상은 귀찮은 일에 또 휘말린 듯 해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어쩌겠나? 알겠다, 돕겠다고 대답했다. 여러 일들을 겪은 후라 그런지, 이젠 이해보다도 수긍이 대체적으로 먼저인 준상이었다. 거북선은 다시 하강하며 청와대로 향했다. 저쪽에서 아까부터 놀라 준상을 쳐다보던 길동이 있었다. 곧 준상에게 조심스레 다가와 고주망태에 대해 물었다. 그 옆의 영실은 길동을 예의주시하며 감시를 하듯 가만히 지켜보았다.

? ~ , 절 훈련시켜주시고 이것들과 함께 이곳까지 인도하신 분이지요!”

준상은 들고 있던 나무 봉들을 보며 대답했다. 길동이 경계를 하다가 풀며 반가운 듯이 다시 물었다.

당신도 도깨비의 힘을 얻으셨군요?”

당신도 그렇습니까?”

, 그리고 그 고주망태 영감하고도 인연이 있지요. 이 힘이 도깨비의 힘인지 알게 해준 분이죠.”

그놈의 영감탱이, 허튼짓은 안하던가요?”

맞아요, 그 영감의 장난질은...”

완전, 옘병할 것!”

준상과 길동은 동시에 소스라치며 외쳤다. 둘은 묘한 동질감으로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 제가 모시던 형님에게 무공의 형태로 이 손바닥을 통해 힘을 이어받았지요. 그쪽 힘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궁금해지네요.”

길동은 준상의 나무 봉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 이건, 그러니까, 그동안 제가 애착까진 아니지만 손에서 항상 지녔던 것의 형태를 빌려왔지요! 고주망태 할아범이 그러셨거든요. 가장 익숙한 것이 힘의 형태가 된다고요.”

준상은 길동에게 자신의 힘을 얻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청룡과 백호의 힘을 얻고 문양 중앙으로 돌아온 나는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들기 조차 힘들던 방망이의 무게는 새털처럼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할아범, 이거 무게가 가벼워진 거죠? 전엔 분명히 엄청...”

왠지 알 것 같은 뿌듯함에 설레발치듯 할아범에게 물었다.

아직 하나 남았느니라. 이것을 하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지!”

할아범은 다시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해 가장 익숙한 물건 하나가 떠오를 때까지 생각 비우기를 하라 했다.

, 또요?”

투덜거려봤자 소용없었기에 난 순순히 눈을 감고 다시 생각을 비워나갔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척 수월하고 여유로웠다. 눈을 감은 내 앞에 또다시 넓은 바다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눈을 뜨지 않아도 왠지, 푸르고 시원한 풍경을 알 것만 같았다. 사납던 청룡과 백호는 느껴지지 않았다. 청룡이 요동치던, 거센 파도가 일던 바다는 따가운 햇살을 받아 얌전해진 것이 느껴졌다. 할아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마음의 눈을 떠 보거라.”

할아범의 말에 난 슬며시 눈을 떴다.

스키아!”

내 앞에 판부렌즈와 레티노스코프, 일명 스키아가 나란히 있는 게 아닌가?

이건 분명! 이거였다니!’

분명 얼마 전까지 검안사로 안과에서 일할 때 쓰는 나의 도구쯤 되는 것들이었다. 판부렌즈가 박혔던 봉은 실제보다 더 두껍고 컸다. 실제가 단검이면 이건 장검이랄까? 전에 분명 나도 이런 상상을 하곤 했지만, 정말로 나의 판타지적인 무기가 될 줄이야! 그것을 잡고 일할 때처럼 스키아의 빛줄기를 켜고 판부렌즈 봉에 대고 긁어댔다. 빛줄기가 렌즈구멍을 통과할 때마다 장풍처럼 뭔가가 나갔고, 바다 표면에 닿아 커다란 해일을 일으키기도 했다.

오호호~! 좋은데? 근데 렌즈는 들어있지 않네?”

내가 힘에 심취해 있을 때 문양으로 돌아오라는 할아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현실의 눈을 떴을 때 난 다시 할아범 앞에 앉아있었다. 내 손엔 신기하게도 묵직한 방망이 대신 스키아와 렌즈 없는 판부렌즈 봉이 들려있었다.

렌즈는 없는 것 같은데, 아직 완성이 덜 된 건가요?”

내 물음에 영감님은 말했다.

자네의 힘은 소환수를 다루는 소환사의 형태로 완성은 되었네! 기본적으로 자네가 방금 했던 장풍 같은 힘을 쓸 순 있지. 하지만 소환구슬을 모아 구멍들에 장착을 하며 발전시켜야 될 것이야!”

난 스키아를 허리에 차고 판부렌즈 봉 다섯 개는 양어깨에 맸다. 이쯤 되니 용사라도 된 기분이었다.

 

워어, 굉장해요, 정말. ~”

길동이 준상의 얘기를 듣고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며 감탄했다. 준상도 그런 길동을 보니 헤어진 동생 생각도 나고 왠지 기분이 포근해졌다. 길동과 준상의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거북선은 청와대 구역 안으로 들어왔다. 어찌된 일인지 그곳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입구 쪽에는 물론이고, 안으로 들어가도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가 없었다. 행여 잠복이라도 있을까 현무의 거북선은 착륙하지 않고 여러 차례 그곳을 탐지하였다. 이상하리만큼 아무도 없었다. 어느 건물 안,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 덩그러니 쭈그려 앉아있는 한사람이 포착되었다. 대통령이었다. 건물 안으로 거북선은 들어갈 수 없기에 일행은 건물 앞에서 내렸다. 대통령 관저라는 건물은 복잡한 미로로 만들어져 있었다. 미로는 여기저기 부서진 곳이 많았다. 길동과 영실, 그리고 저승사자는 서둘러 그 방을 찾으러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반면에 준상은 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느긋한 발걸음으로 일행을 따랐다. 길동은 그런 그가 왠지 모르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몇 번 돌아봤지만 그냥 그대로 목적지까지 달렸다. 한참을 달린 끝에 어느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다. 딱 봐도 나 대통령 방 입구요! 하고 말하는 것 같이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문이었다. 무게도 상당한지 길동과 영실, 그리고 저승사자까지도 함께 밀어도 열릴 생각이 없었다.

비켜서요.”

뒤에 따라온 준상이 스키아로 문을 조준하며 말했다. 일행은 옆으로 비켜섰고 대포알처럼 발사된 빛 덩어리는 문을 한방에 나가떨어트렸다.

 

6. 대통령과 왕실장

 

준상이 열어준 덕에 쉽게 들어온 일행은 대통령에게 접근했다. 대통령은 일행이 들어온 건 신경을 안 쓰는 건지, 온지도 모르는 건지 계속 쭈그려 있었다. 같은 말들만 계속해서 중얼거릴 뿐이었다.

엄마, 나 게임하고 싶어! 게임기 안 틀어주고 어디 간 거야?”

그 모습을 본 길동은 참으로 기묘하다 생각했다. 이 시대의 대통령이란 자의 모습이 악귀에 휘둘렸던 연산군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했기에.

설마, 정말로 그때 도망간 요괴가 이곳에 온 것인가?’

그러나 악귀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저승사자는 복도 미로에서부터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검은색 깃털 몇 개를 발견하였다. 준서가 만든 괴수의 깃털임이 확실했다. 준서는 이곳을 이미 다녀간 것이다.

또 한발 늦었군! 어디로 또 간 것이냐! 저 놈은 저대로 두고! 너에겐 저 놈은 악이 아니었던 것이냐? 아니면...’

저승사자는 머리가 복잡해졌고, 앞으로 또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다. 턱 밑까지 내려온 다크써클이 그의 얼굴을 한 바퀴 두 바퀴 도는 것 같았다.

준서가 먼저 다녀갔다면 반실신한 이것은 왜 안 데리고 간 거지?’

답답한 마음에 저승사자는 대통령의 뇌 속 인생영상을 보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무언가 장금장치라도 된 냥 영상들을 건져 올리는 걸 막아섰다. 그제야 목에 걸쳐진 한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 물건을 이 자가 어떻게!”

그 목걸이는 옥황상제나 염라대왕쯤 되는 높은 신격쯤 되는 존재들만이 취급하는 것이다.

이런 한낱 인간의 목에 걸려있다니!’

저승사자는 더욱 더 영문을 모르게 되었다.

이대로 그냥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나? 그러면 어디로 가야되지?’

여러 생각으로 행동을 멈추게 된 저승사자였고, 옆에 있는 길동과 영실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 방엔 어느새 준상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대통령을 데리고 나가려 했다. 길동이 쭈그린 대통령을 업으려 몸에 손을 댔다. 그 순간 어디선가 충격파가 일어, 길동을 벽까지 날려버렸다. 길동이 부딪혀 한쪽 벽이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그 반대쪽 벽도 무너지며 두 사람이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 너는! 어헛, , 으으음... ...”

저승사자는 놀라며 한번 쳐다보다가 왠지 민망한 사람처럼 똑바로 쳐다보질 못했다. 한사람은 준서였다.

엄마! 나 게임기! 게임기 틀어줘~! 게임기~!”

지금까지 멍하던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아이 씨, 이놈아 지금 게임하게 생겼니?”

인상을 팍 쓰며 대꾸하는 또 다른 사람은 준서가 잡은 우두머리 민은국까지 조종하던 왕실장이란 자였다. 대통령은 굴하지 않고 계속 얘기했다.

그럼 저, 나 스마트폰이라도 좀 줘~ 엄마! 게임하고 싶어 미칠 거 같애!”

 

몇 시간 전, 무인도에서 증인들로 괴수를 만든 준서는 청와대로 향했다.

이제, 이 판도 한 놈만 남았군!”

세간에 떠들썩해진 하나 남은 갑질러, 대통령을 잡아들이기 위해서였다. 우두머리란 놈의 머릿속에서 들은 왕실장이란 목소리가 걸리긴 했으나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었다. 대통령도 마저 붙잡아 머리를 들여다 볼 수밖에. 준서는 요란한 번개를 동반하며, 입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괴수들은 입구의 경비원들을 보더니 짖기 시작했다.

그래, 니들이 배가 고프구나, 한 점도 남기지 말고 저 구역에 있는 놈들을 전부 먹어 치워라!”

준서는 손으로 괴수의 엉덩이를 한번 세게 쳤다. 괴수는 경비원들에게 달려들었다. 경비원들은 총을 꺼내어 괴수에게 쏴댔지만 소용없었다. 그마저도 몸에 붙은 여러 대가리들이 앞 다투어 먹어치웠다. 입구 문을 부수고 여러 건물에 있는 사람들도 전부 다 먹어치웠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며, 살점은 물론이고 뼈까지 다 씹어 삼켜 피 한 방울 바닥에 흘리는 법이 없었다. 다 먹어치운 괴수는 포효하듯 하늘에 대고 울어댔다. 그 순간 음산한 빛을 뿜으며 몸통 양 옆으로 날개가 하나씩 펼쳐졌다.

네깟 놈들도 진화라는 걸 하는구나!”

걸걸한 목소리로 준서는 웃으며 말했다.

, 이제 굵직한 걸로 한 놈 또 잡으러 가자!”

준서는 괴수를 타고 대통령에게 향했다. 미로가 펼쳐져 있는 걸 본 준서는 이리저리 벽들을 부숴가며 다녔다.

 

, 화려하고 거대한 문을 부수고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한 중년의 여성이 앉아있었다. 대통령이 아니었다.

, 누군데 여기 앉아있어?”

준서는 황당하여 물었다.

그건 침입자가 할 소리는 아니지 않아?”

담배연기를 뿜어대며 여자는 말했다.

그러는 넌, 너도 침입자 아냐? , 네가 그, 왕실장이구나? 변조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았니?”

준서는 우두머리 머리에서 들었던 목소리 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오호호, 판단력 죽이는데?”

여자는 잡아들인 우두머리완 달리 당황하는 모습은 없었다. 오히려 당당했다.

판단력은 개뿔, 네가 뭘 믿고 계속 까부는 진 모르겠다만, 이젠 니네 장난도 끝났거든요? 니네 부하 애들 다 내가 처리했다구요! 아세요?”

준서의 말에도 여자는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쩌라고? 어차피 쓰고 버린 애들, 내 알바 아니야.”

준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됐고, 니 뒤로 누구 또 있냐? 아 됐어, 됐어. 있어도 얘기안하겠지, 그냥 잡아서 영상보면 되!”

준서는 왕실장에게 달려들어 머리채를 잡으려했다. 왕실장은 순간 사라지더니 벽 쪽에서 나타나며 우쭐대며 웃었다.

오호, 얘 봐라, 능력자였어? 너도?”

준서도 재밌다는 듯 웃어댔다.

잘됐네, 몸 좀 풀고 싶었는데, 여태 상대가 있었어야 말이지!”

곧 방 안에 둘의 모습은 사라지고 날개를 퍼덕이는 괴수의 모습만이 보일뿐이었다. 건물 여기저기서 작은 번개들이 치기 시작했고, 벽도 점점 부서져 내리기 일쑤였다. 준서와 왕실장은 그렇게 한참을 관저건물을 부셔가며 싸우다가 준서의 그 무인도까지 이동해 갔다.

 

야 그만, 그만하지? 계속 댐빌꺼냐?”

왕실장은 숨을 헐떡대며 물었다.

병신, 이제 시작도 안했어! , 준비만하고 끝내니? 으이그...”

무인도 해변에 마주보고 서로 헐떡대고 있는 둘은 끝도 없을 발길질, 주먹질, 싸대기질을 서로에게 지치도록 해댔다. 속도만 빨랐지 그냥 지나가는 누군가의 눈엔 동네 취객들이 벌이는 한밤중의 개싸움이라 할 모습이었다. 아니면, 지켜보는 이의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에로틱한 음악이라도 흘렀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관찰자의 얼굴을 홍당무로 만들고 몸도 달아오르게 했을지도... 어쨌든, 이곳은 아무도 없었다. 곧이어 쫒아온 준서의 괴수가 하늘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괴수가 갑자기 날개를 퍼덕여 바람을 일으켰다. 나뒹굴고 있는 둘을 다시 청와대, 그 중에서도 거북선 일행이 있는 대통령의 관저로 데려갔다. 둘은 그렇게 진흙탕에나 어울릴 만한 몸싸움으로 나뒹굴며, 본의 아니게 그런 모습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허허, , 남사스럽구만!”

대감님, 이 시대 사람들은 참으로, 때와 장소를 안 가리나 봅니다!”

길동과 영실은 부둥켜안고 벽을 무너뜨리며 굴러온 두 남녀를 보며 경악하듯 혀를 처댔다.

, ! 아니야~! 뭔 생각들을 하는거야... , , 지랄맞아서리...”

염병, 미친놈들, 생각하는 꼬라지들하고는! 근데 저 후즐근한 놈들은 뭐야?”

준서는 여태껏 중 제일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변명 아닌 변명의 목소리를 외쳤다. 왕실장도 길동과 영실을 보며 한마디 거들었다.

, 그래그래, 알겠어! 영감님, 옛사람들인 우리가 이해해야겠죠! 시대차이니깐요!”

, , 그래야겠지! 길동아, 이곳은 우리의 시대가 아니니라! 눈을 감자꾸나!”

길동과 영실은 그들만의 시선에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 , 뭣들 지껄이는 거야? 그나저나 이런 개새! 왜 갑자기 여기로 보낸 거야?”

흥분을 감추지 못한 준서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괴수에게 화풀이하듯 따져댔다.

것보다, 엄마! 내 게임기, 연결 좀 해달라니깐? 아니면 스마트폰이라도 주고!”

대통령도 한결같았다.

에이 씨, 이게 뭐야! 어이~! 대결은 다음으로 미루자! 이런 기분으로 도저히 결판내지 못할 것 같다! 다음에 만날 땐, 목숨을 내놔야 할 것이야!”

준서와 일행들이 대응조차 못하게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왕실장은 사라졌다.

엄마! 또 어디가? 엄마! 내 게임기, 엄마! 울 엄마 또 어디가? 누가 저, 게임기 연결할 줄 아는 사람? 없네, 누가 울 엄마 좀 다시 불러줘요!”

이 와중에도 대통령은 한결 같았다.

그 다음 순간,

재미는 좋으셨나?”

준서의 목에 닿은 칼날하나가 있었으니. 준서가 전에 봤던 검, 소멸의 검이었다.

저승사자는 다른 한쪽 손으론 달려드는 준서의 괴수를 막으며, 준서의 목을 위협했다.

, 아직 분엔 안차지만, ~!”

준서는 약간 껄렁거리며, 순순히 손을 들어 투항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제, 놀이는 끝났다! 그만큼 했으면 됐다! 더 이상은 나도 못 봐줘!”

저승사자의 얘기에 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항복의 뜻을 밝혔다.

그래요, 근데 먼저 그쪽이 나 부추겼잖아요! 근데 내가 좀 정도가 심했나? 뭐 어쨌든, 인생 살면서, 처음으로 통쾌하게 살아본 며칠나날이었어요! 당신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네요! , 그리고 한 가지, 더 고마운 건...”

준서의 눈은 번쩍 또다시 붉게 빛났다. 그 붉은 빛은 전보다 훨씬 짙은 색깔을 뽐내듯 빛났다.

당신이 빌려준 힘 덕에, 내 고유한 힘을 깨울 수 있었으니까!”

준서는 걸걸한 웃음을 지으며 소멸의 검을 맨손으로 팽개쳤다. 당황한 저승사자는 검을 떨어트렸고, 그 틈에 준서는 괴수 몸에 올라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길동이 손을 뻗어 무공의 힘으로 막아섰지만, 힘은 준서가 더 강했다.

우습다! 저리 치워라!”

하고는 힘으로 뿌리치며 내동댕이쳐진 길동과 그 일행을 뒤로 하고 건물 밖으로 사라졌다. 괴수를 타고 빠져나온 준서는 경복궁의 근정전 하늘을 날았다. 그때 무언가의 공격을 받아 얼마 날지도 못하고 괴수와 함께 돌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준서가 나타나기 전, 준상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주망태 할아범이 해준 말에 따르자면, 지금 이곳에 나의 형제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못 알아보는 것인지, 동생과 형이 자라서 될 만한 인물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일행에는 구시대, 조선시대에서 오백년을 건너온 저 자들이나 저 뚱뚱한 저승사자뿐이었기 때문이다.

, 설마 자라서 현무신이 되었을 리도 없고. 이놈의 영감탱이, 이번엔 헛다리짚은 거 아냐? 아 몰라, 난 미주만 만나면 되는데, 여기서 뭐하는 거람?’

답답한 마음에 관저를 빠져나와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 괴수를 끌던 사람은 안 나타나나?’

문득 꿈속에서의 괴수와 그 주인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한참 후, 꿈에서완 다르게 날개달린 괴수를 타고 달아나는 준서를 보게 되었다. 약간 다르지만, 분명 꿈속의 그 괴수와 그 주인이었다. 그를 놓칠세라, 거대한 포물선을 그려가며 쫒았다. 할아범이 준 도깨비 망토 덕에 쫒아갈 수 있었다. 근정전 지붕에 올랐을 때, 준상은 스키아를 꺼내들었다. 약간 앞서 날고 있는 준서는 스키아에 맞은 괴수와 함께 지상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래, 이곳이구나! 그 꿈속에서의 장소!’

얼마 뒤 꿈속에서처럼 거북선이 하늘에 나타났고, 배는 빛기둥을 내려 길동과 영실과 저승사자를 내려주었다.

이제야, 꿈속 장면이 완성이 되었어! 내 동생, 그리고 형님은 누구지? 아니면, 이제 누군가 또 나타나는 건가?’

아직 모인 인물들 가지곤, 형제들이란 생각이 좀처럼 확신이 없어서 좀 더 지켜보는 준상이었다.

 

붉은 눈의 준서는 곧 정신을 차렸지만 도망치진 못했다. 괴수는 준상의 스키아로 쏘아올린 빛덩이에 묶여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어째서인지, 순간이동도 되지 않았다. 곧 거북선일행들이 쫒아왔다.

후회할 짓은 이제 그만하시오!”

영실대감이 준서에게 말했다.

맞아요, 더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세상을 바꿔나가야 하지 않겠소? 이렇게 화풀이만 할 것이 아니오. 이리 하시면 옛 시절 연산군과 다를 바가 없소이다! 이제 그만 멈출 때요, 더 늦기 전에!”

길동도 한껏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준서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멈추면 소멸까지 가진 않을 것이다! 제발 멈추고 수다쟁이 버스기사로 돌아오게!”

저승사자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나 준서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헛소리들 말아! 이 세상엔 오직 강한 힘을 가진 심판자만이 필요할 뿐, 다른 것들은 거추장스럽지!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날 방해한다면 여기서 사라져줘야 할 것이야!”

왕실장과 싸울 때완 달리, 준서의 눈빛과 행동하나하나는 진지하고 어두운 붉음 그 자체였다. 운동선수가 몸 풀리고 본 경기를 뛰듯, 일행들에게 빠르게 달려들었다. 길동은 간신히 그를 막아섰다. 아까완 다르게 길동의 힘도 준서의 힘만큼 밖으로 끌어 올라와 있었다. 그들은 바람을 일으키며 준서와 왕실장과의 대결 때처럼 충격파를 일으키며 이리저리 난투극을 벌였다. 그러나 이번엔 동네 개싸움이 아니었다. 액션배우들의 합처럼 서로 밀리지 않고 손과 발, 그리고 온몸을 부닥치며 싸워나갔다. 당장이라도, 누구하나 나가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었다.

싸움이 이렇게 즐거운 것이었군!”

이하동문이다, 이놈아!”

준서와 길동은 헉헉대면서도 왠지 즐거워보였다. 마치, 라이벌 간 대결이 이럴까? 그렇게 한참을 대결에 힘을 뺐을 때였다. 어디선가 기타와 드럼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동시에, 땅바닥에서 수많은 물방울들이 튀어 올랐다. 물방울들은 그 리듬에 맞춰 사방팔방 요동치며 일행들을 적셨다. 울퉁불퉁한 돌바닥 틈은 어느새 흐르는 물로 흥건하게 적셔진 상태였다.

 

7. 왕의 강림!

 

주상전하 납시오! 록큰롤!”

time to play the game~, 우후후후~!

근정전 문이 열렸다. 분명, 이곳은 2016, 현대사회다. 지금 이 순간, 경복궁의 근정전 안엔 문을 열고나올 옛 왕조의 임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 문이 열리며, 스피커하나를 든 내관하나가 나오며 외쳤고 걸어 나오며 옆으로 빠졌다. 그 뒤로 용포를 휘날리며 누군가 록큰롤에 맞춰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멈추어라! 이놈들!”

그 목소리는 음악과 함께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나 이도! 짐이 이곳에 왔노라, 화려하게 과인을 맞이하라!”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구름 한 점 없던 맑은 하늘은 급하게 먹구름을 몰고 왔다. 용포의 남자는 뻗은 두 팔을 위아래로 휘저었다.

그러자,

퍼버펑! 콰광쾅! 쾅쾅광! 콰광쾅쾅!

번개들이 일행 옆을 지나치며 바닥에 내리꽂혔다. 준서와 길동, 영실은 물론이고, 근정전 지붕에 있던 준상도 그 기운에 절로 바닥으로 떨어져 몸을 바싹 엎드렸다. 망토가 없었다면 준상은 목숨을 잃었을지도. 저승사자는 어느새 거북선 위치쯤으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성공하셨군요?”

당연하지! 내가 누구더냐? 이까짓, 별거 아니지, 시간을 끌어준 네 덕이 컸다, 오랜만에 잘했다!”

길동과 영실은 주먹을 서로 맞대며 작은 축배를 나눴다.

 

영실은 길동과 준서가 싸울 동안 약병하나를 울퉁불퉁한 돌들 사이로 흘려보냈었다. 그것은 영실이 국문을 당하기 전, 옥에 막 갇혔을 때 얻은 것이다. 늦은 시각, 임금은 영실에게 서찰과 약병하나를 몰래 보냈다.

[영실대감 보시오! 그대와의 시간여행을 기획한 것도 엊그제 같은데, 이제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 한다니, 참으로 야속한 세상이오! 물론 내 이번 생이 길지는 않겠지만. 이곳에서는 더 이상 그대들을 볼 수 없으니, 서운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소! 과인의 생이 다하기 전에 그대를 이렇게라도 보호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오! 잘 가시오! 이번 생, 후에나 봅시다! 추신- 삼형제를 찾았거나, 동료가 될 만한 인재들을 찾았을 때 말이오! 그래서 과인을 부를 일이 있을 땐, 근정전 앞에서 그 약물을 근정전 돌바닥 사이로 흐르게 두시오. 그러면 과인이 소환될 테니! 트리플 에이치가 되어 나타나리다. 타임 투 플레이 더 게임, 우후후후!]

서찰을 받아본 영실은 마지막 문장에 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미래에서 보셨던 프로레슬링이란 것에 꽤 인상 깊어 하셨군! 타임 투 플레이 더 게임, 우후후후! 라니... , 순수하신 분일세!’

 

흐르는 음악을 배경삼아 이도는 가소롭다는 듯, 고개를 돌려가며 일행 하나하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엔 안경이 씌어져 있었다. 흐르는 록큰롤에 몸을 맡긴 채 걸음을 이어나갔다.

이쯤이면 트리플 에이치가 따로 없을 것이야!’

이도는 내심 뿌듯해했다. 이도의 발걸음은 길동 앞에서 멈췄다.

길동아, 저들을 몰라보겠느냐?”

갑작스레 던진 임금의 질문에 길동은 당황했다.

?”

길동이 입을 떼려하기도 전에, 이도의 발걸음은 다시 시작되었고, 이번엔 준상의 앞이다.

그대였군! 그대는 저들을 기억하는가? 그리고 보명옹주는? 아니지, 이렇게 물어보면 모르겠군, , 그 이름이 뭐였더라?”

? 혹시, 미주...”

준상이 고개를 들어 대답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이도의 발걸음은 이미 저만치에 가있었다. 이번에는 준서 앞이다. 준상은 이도의 기운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대는, 저들이 기억나시는가?”

준서는 돌바닥에 처박힌 머리를 들어 올리지 않고, 계속 그 상태였다.

, 이 자는 상태가 그리 좋지 않군! 그리고 이 붉은 빛은, 그 요괴의 짓인가?”

이도는 길동과 준상이 있는 쪽으로 돌아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이런, 못난 놈들! 지들끼리 싸우기나 하고. 시국이 어느 땐 줄 알고 이 씨...”

그때 길동과 준상은 각자 앞에 나타난 여인들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서방, 정신차려! 또 싸대기 좀 맞을까?”

길동 앞에는 초희가 서 있었다.

네가 여길 어떻게 왔어?”

길동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저 분이랑 임금님 가시는 길을 좀 따라왔지.”

길동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초희 얼굴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 너 들키면 어쩌...”

너무 그러지마 서방,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니까! 것보다 서방.”

초희는 눈을 찡긋하더니, 길동의 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내가 비밀하나 알아냈어, 서방 꿈에서 나오는 사람들 말야!...”

초희의 속삭이는 이야기에 길동의 눈과 귀가 쫑긋했다.

 

잘 찾아왔구나?”

준상 앞의 한 여인이 그를 보며 울먹일 듯 말했다.

, , 어떻게, , ...”

준상도 앞의 여인을 보고 더듬거릴 뿐, 아무런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눈가에 눈물이 맺혀 흐를 뿐이었다. 여인은 눈물을 닦아주려 준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섰다.

이것 놔!”

여인이 수건을 꺼내 준상 얼굴에 대려하자 준상은 뿌리쳤다.

내가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니 덕분에... 덕분에... 얼마나 내가 고마워했었는데...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 ...”

준상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의식 속 엄마를 만났을 때처럼 또다시 훌쩍거리는 울보가 되었다.

미안해, 그땐 어쩔 수가 없었어! 나도 많이 혼란스러웠었거든, 그치만! 그치만 아직 난, ...”

여인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눈물을 참아내기 힘들어보였다. 준상은 그런 여인을 꽉 안아주었다.

아니야 미주야, 이제 됐어! 이렇게 또, 내 앞에 나타나줬으니까!”

그렇게 꽉 안고 한참을 있었다.

근데 준상이 너, 눈물도 흘릴 줄도 아는구나?”

그럼, 내가 뭐, 날 뭘로 본거야?”

둘은 이 순간이 한없이 기뻐서 울으며 웃고, 또 울으며 웃었다.

, 너한테 따질게, 많거든? 궁금한 것도 많고, 그렇게 웃을 때 아니거든?”

그러세요, 울보씨! 울보야!”

사정이야 어찌됐든 둘은 부둥켜안고 그렇게, 그렇게 서로의 한쪽어깨를 적셔갔다. 울다 웃다, 이건 뭐, 나중에 그 엉덩이들 누가 한번 확인해봐야 할 문제로구나!

생각보다 빨리 만났네그려!”

이도가 몸을 바짝 낮춘 영실에게 다가갔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도는 영실을 일으켰다.

그대들의 노고가 많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많을 것일세! 계속해서 수고를 좀 해주어야겠어!”

, 전하, 하온데 아직, 삼형제는 찾지 못했사옵니다.”

허허 이 사람아, 이걸 쓰고 저기 셋을 보게~”

이도는 안경을 벗어 영실에게 주며 준상과 길동을 가리켰다. 안경을 쓴 영실은 준상과 길동의 얼굴을 보니 눈이 동그라졌다. 몰라봤던 자신이 한심할 정도로, 안경으로 본 그들의 외모는 비슷했다.

저들이, 저 길동이가 삼형제 중 한명이었다니!”

자네! 자신의 발명품을 그리 활용하지 못해서야, 어찌하겠나?”

깊이 새기겠나이다. 전하!”

이도와 영실은 그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저기, 실례되오만, 그대가, 내 형님 되시오?”

길동은 준상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 내게도, 헤어진 형과 동생이 있긴 있지만...”

준상도 대답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서로 너무 어릴 때 헤어진 터라 기억에서 많이도 지워진 상태였기에. 그리고 애초에 자라온 시대가 다르지 않은가? 초희와 미주가 옆에서, 둘이 형제라고 아무리 설명해줘도 당사자들은 실감하진 못했다. 그때였다.

이보시게들!”

하늘에서 지켜보던 저승사자가 땅으로 내려왔다.

그대들이 준서, 저자의 형제들인가?”

저승사자의 손 위로 둥그런 무언가가 떠있었다. 정작, 당사자들이 혼란스러워 보여 한마디 덧붙였다.

이걸, 보시게! 그럼 기억나겠지...”

저승사자는 손 위에 있는 영상을 보여줬다. 전에 준서의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던 것이다. 길동은 그 영상을 보자, 직접 꿨던 꿈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꿈과 너무나도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영상 속, 준서는 누군가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있었다. 준상은 그 뒤에서 길동을 감싸다가 둘 먼저 어디론가 달려 사라져갔다. 그렇게 영상은 멈췄다.

형님들, 이셨군요, 저의, 진짜...”

이제야, 길동 꿈속의 안개가 사라졌다. 길동은 여러 복잡한 심정이 들어 흔들리는 눈동자 위로 눈물이 흘러넘쳤다. 곧이어 몸까지 흐느꼈고, 떨림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괜찮아, 서방, 괜찮아! 이제 겨우 만난 거잖아, 서방 가족 말이야!”

초희는 쓰러지는 길동을 감싸 안으며 같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주문을 외우듯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러나 길동의 몸은 계속해서 추위에 몸을 떨듯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정해. 이제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형하고 다시 만났으니까!”

길동의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으며 단번에 진정시킨 사람이 있었다. 바로 준상이었다.

, 날 두고 어딜 갔었어? 형이 없어져서 얼마나 무서웠다고!”

그때, 형이 준성이 널 혼자 둬서 미안해. 그렇지만, 큰형도 걱정됐었거든. 그래도 금방 돌아왔었는데, 네가 없었어. 그때 그렇게 가보는 게 아니었는데...”

전엔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던 준상이었다.

아 씨, 내가 왜 이러지?”

이 여정이 시작된 후, 그동안 참았던 게 터진 것 마냥 한번 흐르면 멈출 줄 모르게 되었다.

준상이도 가족을 찾아서 참 다행이야!’

미주는 예전의 소심하고 무표정하던 준상을 떠올렸다. 그리고 조금은 자신을 드러내 보인 그를 바라보며 괜시리 눈물 머금은 눈으로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참을 운 준상의 얼굴엔 더 이상 귀차니즘은 없었다.

이제, 확실해졌군. 이 모든 게 우리 형제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할 위함이었어!”

침착하게 상황을 바라보는 삼형제 중 둘째, 그리고 막내를 돌보는 형으로서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울보처럼 울더니, 갑자기 침착한 척 분석이나 해대고, 자네도 가지가지 하네그려!”

이도는 영실과 같이 다가오며 장난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사옵니다. 길동이 저놈이 누굴 닮았나했더니, 형제들이 아주 똑같사옵니다!”

대감님! 뭐래는 거요?”

으이그, 자네들 시끄러운 건 여전허이!”

언제나처럼 길동과 영실이 투닥거렸고, 그리고 언제나처럼 이도도 훈계를 놓았다. 준상과 미주, 그리고 초희도 오랜만에 활짝 웃어보였다. 그렇게, 쓰러진 첫째를 제외한 둘째와 막내의 눈물바다의 화목한 재회가 마무리됐다. 그 무렵, 근정전 마당 한구석에선 붉은 기운이 점점 짙어졌다.

 

8. 회상, 그날의 숲

 

, 몸이 뜨거워진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지금, 내 두 눈에 그리운 사람들이 보인다. 저 무리 속에 내 동생들이 저렇게나 환하게 웃고 있어! 혹시 이건 환각인가? , 주마등같은 것인가? 그런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유미야, 드디어 내 동생들을 찾았어. 너도 보고 싶어 했잖아... 우리 서진이한테도 드디어 삼촌들을 갖게 해줄 수 있단 말이야! 내가 잘못했어. 유미야... 돌아와, 이젠 돌아와 줘, 유미야... 잘못했어... 서진아 잘못했어... 아빠가 잘못했어... 이젠, 진짜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준서의 붉은 눈동자 위로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 눈물이 눈꺼풀을 덮치며 밖으로 흐르며 점점 짙어지던 붉은 기운은 옅어졌다. 검은 눈동자로 돌아온 그의 두 눈은 동생 준상과 준성이 다가오는 걸 보다가 두 눈꺼풀을 닫았다. 준상아, 준성아, 내 동생들, 무사했구나...

 

허억, 허억, 허억...

숨이 차올랐다. 그날만 생각하면 지금도 숨이 차오른다. 그러나 그때의 나와 준상인 그 숲을 달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준상아 계속 뛰어~! 뒤돌아보지 말고!”

계속 소리치며 달렸다. 내 양 팔엔 하염없이 울고 있는 막내 준성이 들려있었다. 준성이는 한쪽팔과 한쪽 다리가 불편한 아이였다. 그래서 내가 업고 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 숨이 차오르는 속도는 점점 더 가속화되었고, 반대로 내 몸은 점점 더 느려졌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 순간 내 몸은 고꾸라져 나뒹굴었다. 바위나 나무뿌리에 걸린 건 아니었다. 우리를 쫒아오는 남자의 채찍이 내 발 한쪽을 옭아맸던 것이다. 아직 내 팔위에 있던 준성은 더욱 크게 울어댔다.

이놈시키들이, 어딜 도망가 썅!”

남자는 혀로 덧니를 더듬으며 껄렁껄렁 말했다. 남자의 붉은 눈빛은 방금 전, 집에서보다 더욱 붉고 음산해졌다.

대체, 왜 이러세요~! 정신 차리세요! 아버지!”

나는 막내를 감싼 채 소리쳤다.

그 아이 이리 내! 네가 가까이 할 아이가 아니야! 저 아이는...”

우린 형제라구요! 준성인 우리 막내란 말이에요! 무엇보다 아버지 어머니 아이잖아요!”

웃기지마! 누가 내 아이야? 저런 불결한 아이는 그 정신 나간 여자가 낳은 괴물일 뿐이야! 지금 없애야...”

아버지의 말에 난 욱하며 소리쳤다.

그만 좀 하세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아버지 자식한테!”

불결한 놈이란 말이다!”

아버지란 사람은 고집을 꺾을 기미가 없었다.

하긴 지금 꺾일 거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아버지는 내게로 다가와 막내를 뺏으려했다. 난 순식간에 준성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실랑이하는 처지에 놓였다. 항상 그래왔듯 술에 취한 그는 힘이 장사였다. 얼마나 버틸지 나조차도 몰랐다. 다행인지 막내의 더 커진 울음소리를 듣고 되돌아온 준상이 막내를 내게서 데려갔다.

준상이 이놈! 그거 당장 안 가져와!”

그는 준상이의 얼굴을 보며 불같이 화를 냈다. 난 아버지가 방심한 틈을 타 그의 몸을 밀쳐냈고, 우리는 다시 달릴 수 있었다.

이 썅, 이것들을 진짜!”

 

기대완 다르게 얼마 가진 못했다. 얼마 가지 않아 내 등엔 통증이 밀려왔다. 채찍이었다.

아 도대체, ! 이젠 어떡하지? 어떻게 도망가지? 이대로는 힘든데...’

막막함이 밀려왔다. 채찍은 어찌나 긴지 앞서가는 준상의 등까지도 도달했다. 막내를 안은 준상은 채찍에 맞아 쓰려졌다. 나는 채찍에 뛰어들어 준상에게 더 이상 해가 안가도록 했다.

그만 좀 하세요!”

들어 처먹지 않을 그에게 나는 소리쳤다.

준서 너, 몸집 좀 커졌다고 아부지한테 대드는 거냐? 혼나야겠구나!”

그의 채찍은 나의 가슴팍과 다리, 팔 쪽으로 표적을 맞췄다.

다행이다. 당분간은 동생들은 괜찮겠구나!’

이런 안심도 할 여력도 없이 난 다시 소리쳤다.

도망가! 둘이 먼저, 어서!”

쭈그려있던 준상이는 다시 일어나 막내를 데리고 달렸다. 준서도 등에 채찍을 맞아 그런지 막내를 안지는 못하고 팔을 꼭 붙들고 최대한 달리기 시작했다. 이 형이 최대한 붙잡아 둘 테니까, 도망가 어서! 눈물이 났다. 내 온몸을 강타하는 채찍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화목했던 우리 가족이 처참하게 망가진 이 현실이 너무나도 아팠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늘에 떠있는 저기 저 보름달님은 우리에겐 동아줄하나 내려줄 맘 같은 건 애초에 없는 건가?

포근했던 보름달은 더 이상 없었다. 범보다 사나운 채찍의 사나이가 내 앞에 있지만, 가느다란 동아줄은커녕, 사늘한 달빛만이 내릴 뿐이었다. 더 이상 내 정신도 못 참겠는지, 현실에서 도피하려는지 잠시 작동을 멈췄다. 눈을 뜬 순간,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바다였다. 그리고 내 앞에 쓰러져있는 아버지도 보였다. 자세히 보니 이젠, 그냥 차가운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던 걸까?

지금도 의문으로 남지만 고깃덩어리는 썩어 문드러져 형체를 잘 알아보기 힘들었고 모레마냥 쉽게 흐트러졌다. 그나마 걸쳐진 옷만이 아버지란 증거를 내보였다. 그곳은 우리가족이 즐겨 찾던 바닷가였다. 그곳은 우리 가족의 행복함이 묻어있는 공간이었다. 특히나, 어머니가 참 좋아했던 곳이었는데, 그 순간은 처참한 공간으로 바뀐 날이었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구요!”

나는 소리치며 아버지 옷을 붙들고 그렇게 한참동안 오열했다. 그때도 난, 어느 누구도 지켜내질 못했었네. 난 그런, 버러지야... 나란 놈은, 나 같은 놈은... 아버지... 어머니.. 어머.....

 

...

쓰러진 준서 곁으로 누군가 다가갔다. 준서가 본대로 그의 동생 준상과 준성이었다.

, 저 사람이 우리 큰형이야?”

길동은 떨리는 목소리로 준상에게 물었다.

그래, 우릴 지켜준...”

둘은 울컥한 마음에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널 그곳에다 두고 잠깐 돌아갔을 때, 그때 말야...”

준상은 가까스로 울음을 참아가며 이야기했다.

난 그때 저 붉은 빛을 봤어! 분명, 약해져가는 아버지 것보다 짙고 붉어지는 불빛이었지. 마치 아버지 것을 흡수라도 하듯, 혹은 큰형에게 그 불빛이 옮겨 붙고 있었는지도 몰라.”

 

여기 조금만 있어! 어디 가면 안되! 알았지? 형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된다!”

나는 우는 막내를 어느 널찍한 나무에 기대어 두고 큰형이 걱정되어 되돌아갔다. 그때 난 보게 된 것이다. 형의 온 몸을 감싸던 그 붉은빛이 아버지까지 집어 삼키고 있는 걸 말이다. 나는 무서워서 두터운 나무줄기 뒤에 숨어서 나서진 못하고 옴짝달싹했다. 그 불빛은 뜨겁고 강렬했다. 내 눈을 쉽사리 못 뜨게 할 정도로!

그러더니 어느 순간 강렬함이 느껴지지 않아 눈을 떠보니, 그곳엔 나 혼자였다. 나는 그들을 다시 찾아다닐 엄두가 나질 않아 다시 막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시끄럽게 울던 막내의 울음소리도 그 어느 것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막내를 찾으려 숲을 아무리 뒤져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지쳐 쓰러지기 전까지 정말 쉴 새 없이 소리치며 찾아다녔다. 그러나 그 숲엔 나와 절망으로 바뀐 집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막내는 어디로 갔던 것일까? 형님과 아버지, 어머니는 또 어디로 사라진 거였을까?

 

이야기를 듣던 길동은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머금었다.

울지 마 인마, 그만 울어. 형들 다 만났잖아 이제~, 이젠 울 일 없을 거야. 그나저나 넌 어떻게 된 거야?”

준상은 길동의 눈물을 닦아주며 넌지시 물었다.

모르겠어, 갑자기 어디로 간 건지 뭔지, 기억이 안나 도통... 그냥 뭔가 그 흐린 기억을 억지로 이어가려고 할 때면 멍하니 이 왼쪽 팔이 아파올 뿐이었어. 그리고 난 이 시대 사람인지도 모르고 살아왔거든.”

길동은 떨리는 왼팔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래,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보자. 이젠 급할 건 없잖아. 힘들면 굳이 생각 안 해도 되고.”

준상은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는 길동의 왼팔을 지긋이 잡아주었다.

다들 비켜 보거라. 이제, 너희 형을 되돌려야지.”

저승사자가 다가오며 붉은 수정을 꺼내들었다.

이제 그만, 수다쟁이 버스기사로 돌아오라!”

저승사자는 수정을 준서의 가슴팍에 내리 꽂았다. 가슴팍에 꽂힌 그 수정은 한번 붉은빛을 발산하더니, 준서의 몸 안으로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잘 되었네, 이제 기다리면 곧 깨어날 것이다!”

저승사자는 수술을 막 마친 의사마냥 형제들에게 시크하게 한마디하고 돌아섰다. 이제 준서 일도 처리했으니 한결 마음이 놓인 저승사자였다.

, 힘들어, 맛있는 것 좀 먹으러 가야지!’

입맛을 다신 순간

!

하는 소리가 뒤쪽에서 형제의 비명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깜짝 놀라 돌아본 저승사자의 눈엔 말도 안 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9. 꼭두각시

 

쓰러져 있던 준서의 몸이 꼿꼿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잠잠해졌던 붉은 기운은 다시 그를 감싸버렸다.

, 이게 뭐야, 이럴 리가 없을 텐데?”

저승사자는 의아해했다.

분명...”

분명 수정만 다시 꽂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준서는 아직, 아니 전보다 심한 폭주상태가 된 것이다. 다른 게 있다면 준서의 눈빛은 길동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마치 그의 아버지처럼...

그 몸을 감싼 붉은 줄들은 어느 한곳을 향해 이어져있었다. 줄들을 따라가 보니, 어떤 한 여자가 근정전 울타리 위에서 들고 있는 붉고 긴 채찍이었다. 그 여자는 준서와 방금 전 나뒹굴던 왕실장이었다.

이런, 이런, 이렇게 알아서 귀찮은 일을 대신 해주시다니! 고맙기 그지없어 어쩌나, 저승사자오빠? 오빠도 이제 우리 편 할까? 싫음 말고! 말랑께롱~”

저승사자를 비꼬듯이 얄밉게 웃어댔다.

어쨌든 새로운 장난감이 생겼으니, 한번 놀아나 볼까나?”

여자는 채찍을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그랬더니 준서의 몸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동과 준상 쪽으로 다가가며 그들을 맨 주먹으로 날려버렸다. 준서는 여자의 꼭두각시가 된 것이다.

아니 저건, 꼭두각시술법? 네 형제는 왜 저리도 꽉 잡혀 사는가?”

영실이 쓰러진 준상과 길동에게 다가왔다.

뭐래는 거요? 우리 형을 뭘로 보고, 술법 아니오 술법!”

이제, 형이라 편드는 것이냐?”

어쨌든, 저 여잘 막아야 합니다.”

왕실장은 준서의 괴물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었다. 왕실장은 채찍을 들지 않은 손을 뻗었다. 그러자 괴물의 열댓 대가리들은 일행들에게 차례차례 발사되었다가 다시 몸으로 돌아갔다. 일행들은 가까스로 그 대가리미사일을 피하긴 했으나 고꾸라져 다음 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근정전이며 울타리며, 경복궁 곳곳이 부서졌다. 딱 한 사람, 한 사람만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것도 똥 씹은 표정으로...

보자보자 하니까 이것들이 남의 궁 안에서! 전우치 얜 왜 안와? 연락도 없이!

 

근정전 지붕 위에 누군가 짜증을 내며 서 있다. 붉은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세종 이도였다.

얌마! 너 어디야? 아 글쎄, 왜 안 오냐고! 얌마! 좀 조용히 해! 통화하는 거 안보여? 우치 너 이거 끊고 당장 튀어 와라! 어명 이니라! 늦으면 그거라도 먼저 날려 보내! 어서!”

일행들과 왕실장은 이도의 말을 듣지 못했다. 준서 꼭두각시는 계속해서 일행들을, 특히 길동을 향해 돌진해가며 공격했다. 준서의, 아니 이젠 왕실장의 괴물도 대가리미사일을 계속해서 발사했다.

언제까지 도망칠 꼬얌?”

왕실장은 계속 비웃듯 얘기했다.

아직도 도망만 치는 것이냐?”

준상은 청룡과 백호가 자신에게 도망치지만 말고 자신을 갖고 임하라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언제까지 이래? 까짓거...’

등에서 나무 봉들을 꺼내들었다.

형 미안해!”

어쩔 수 없이 준서를 향해 스키아를 발사했다. 준서는 한번 나가떨어졌지만 다시 일어나 다가왔다. 다시 한번, 스키아를 이번엔 붉은 줄들을 향해 발사시켰지만, 잘 끊어지지 않았다.

소용없는데~ 그딴 공격으로는?”

왕실장은 비아냥댔다. 길동도 손에 기를 모으며 번쩍번쩍한 에너지덩어리를 만들어 준서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큰 형님, 정신 좀 차리소~!”

준서의 몸이 길동을 잡으려 했지만 길동은 그 몸짓을 피해 등 뒤로 가 붉은 줄들에 그 에너지덩어리를 내리꽂았다.

그러자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줄들이 이어지며 길동을 튕겨냈다. 길동은 돌바닥에 나뒹굴었다.

안된다고 했잖니? 내가~”

왕실장은 또 재수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영실대감과 보명옹주와 초희는 괴물의 대가리미사일들을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두 형제들과는 떨어졌다. 보명이 가지고 있던 호신 총을 발사해봤지만 별 소용없었다.

, 좀 더 빨리 힘을 완성시켜야 했어!”

준상은 아직은 불완전한 자신의 힘에 애통해했다.

그리 애통해할 것 없어. 어차피 너넨 다 내게 죽은 목숨이니까! 쓰잘데없는 짓을 뭐하러해?”

왕실장은 한 번 더 얄밉게 웃어보였다.

준서씨? 이제 장난 그만치고 끝을 내 볼까나?”

왕실장은 채찍을 한번 끌어당겼다. 준서의 몸은 포효하며 불기운을 뿜어댔다. 왕실장과 연결된 채찍 줄은 사라지고 그 육체는 재빠르게 일행 한명 한명에게 다가가 치명타를 하나씩 선보이고 마침내 길동에게 다가갔다. 빠르게 길동의 목을 양손으로 포박했다. 준서의 얼굴엔 주저하는 표정도 나타나기도 했지만 양손은 점점 더 길동의 목을 조였다.

으악, 제발, 제발, 돌아와 줘요! ...”

길동은 괴로운 듯 소리쳤다.

길동아!”

! 안되~!”

서방!”

치명타를 얻어맞은 일행들은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절망 섞인 외침만 지를 뿐이었다.

안되~!, 뭐가 안되~! 안되는 게 어딨니?”

 

드디어~, 드디어 홍길동을 처치하게 되었나이다. 전하~! 전하의 원수를, 소녀 장녹수가 이 손으로 전하의 빚을 갚나이다!”

왕실장은 준서의 육체에 달려들어 점점 길동의 숨을 조였다.

죽어라 이놈! 네 형님이 죽여주신대~ 오홍호호호홍

왕실장은 한참을 웃더니 정색하며 한마디 내뱉었다.

죽여라!”

그러자 준서의 팔 하나가 길동의 목에서 준서 등 뒤로 조준하듯 가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길동의 심장부분으로 진격해나갔다. 그러나 심장 바로 앞에서 팔은 멈추며 심하게 요동쳤다.

뭐하는 것이냐! 꼭두각시~ 내말 들어!”

왕실장은 준서 등 뒤로 손을 얹고 다시 명령했다. 다시 팔은 화살처럼 겨눠졌고 다시 날카롭게 진격했다.

그러나,

쿠아아앙~!

포효소리와 함께 팔은 다시 멈췄다.

이자식이 증말~!”

왕실장의 여유로운 표정은 찢어진 눈으로 날카로운 가시가 되었다.

쓸모없는 놈! 딱 지 아비로구나! 흐음, 할 수 없지... 그때처럼 해볼까?”

왕실장은 준서의 등을 손바닥으로 밀어붙였다. 그러자 준서의 붉은 기운은 길동에게 옮겨가려 했다.

그 순간,

콰광쾅쾅~!

하늘에서 번개가 치며 검 두개가 날아들었다.

겨우 도착했군!”

검 하나를 이도가 잡았다. 그리고 또 다른 검 하나의 주인공은 막내, 길동이었다.

수리가 끝났군요. 전하, 오랜만이옵니다!”

방금 전까지 준서에게 목이 졸려 정신을 잃어가던 길동은 갑자기 가뿐히 뿌리치고 검을 잡은 것이다.

아직, 완전하진 않네 그려, 그나저나 역시 자네였군! 개똥이 몸에 힘을 전수한 게 맞았어! 암튼, 지금은 급하니, 한바탕 놀아봅세!”

, 전하~! 자세한 것은 나중에 전부 말씀드리지요. 일단 지금은 그때처럼 날뛰어보겠사옵니다! 전하도 한바탕 추시지요!”

그리 합세, 이번엔 부러지는 일 없도록 합세나!”

이도와 길동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순간 멈췄다가 거센 돌풍이라도 된 듯이 근정전 여기저기를 휘몰아쳤다.

어떠냐? 이게 바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기술이니라.”

이도는 흥분하며 말했다.

으이그, 전하께서 또 흥분하셨네 그려, 왕실장이란 놈이 딱하군, 참으로 딱하게 되었어!”

쓰러진 영실은 이도의 모습을 보며 되려 왕실장 걱정을 했다.

이 지저분한 새는 뭐야!”

이도와 길동이 다가가자 한순간에 대가리미사일의 괴물은 맥을 못 추고 쓰러졌다. 그리고 마침내 왕실장에게 다가갔다.

네가 왕실장이라고? 보아하니, 그때 우리 현손을 홀린 여인이로군~! 어디 갔나했더니...”

, 맞사옵니다. 연산을 홀렸던 그때 그 녹수란 자이옵니다.”

헌데, 그 붉은 빛을 띠던 요괴는 보이지 않는 것 같군!”

이런, 네 이놈들! 여기까지 잘도 쫓아 왔구나! 끈질긴 놈들!”

시끄럽다! 이게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놀리는 게야?”

이번에야말로 끝이다! 이거나 받아라. 이 요물아!”

이도와 길동이 고함을 질러대며 동시에 검을 왕실장에게 내리꽂았다. 비명을 지르며 왕실장은 쓰러졌고, 꼭두각시 술법이 풀린 준서도 바닥으로 엎어졌다.

형님~”

길동은 그런 준서를 잡아내며 자신도 주저앉았다.

전하, 다음에 또 뵙겠사옵니다.”

이도에게 한마디 남기고 도적 홍길동은 정신을 잃었다.

어허, 저 두 길동들을 어찌 할꼬~! 이보시게 홍 판서, 자네라면 저 둘을 어찌할 텐가?’

이도는 근심 어리게 길동을 바라보며 한 사람을 떠올렸다.

 

10. 홍 판서의 아이

 

홍 판서는 내게 언젠가 한 아이를 데려왔었다.

그간, 유배지에서 고생이 많았네! 그런데 그 아이는 누구인가?”

난 아이를 보며 홍 판서에게 물었다. 홍 판서는 주저하며 아무런 말을 못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 전하~! 소신, 부탁드릴 것이 있어 찾아뵙나이다.”

그는 유배생활을 했던 동래에서 누군가의 부탁으로 그 아이를 거뒀다했다. 그 누군가는 사람이 아니라 고주망태라는 할아범의 형상을 한 도깨비라 했다.

도깨비라 하였느냐? 그렇다면 저 아이도 도깨비인가?”

그것은 아니옵고, 그 고주망태 도깨비도 이 아이를 절벽에서 발견했사온데, 그때 그 생명이 위독하여 힘을 약간 심어주었다고 하옵니다! 그래서 인간인 이 아이도 장차 성인이 되어갈 때 도깨비의 힘을 조금 갖게 될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헌데, 도깨비의 힘을 받고 인간과 멀리 살면 자칫 왜로 쫓겨 간 오니 족들처럼 난폭하게 될 우려가 있어, 인간에게 찾아온 것이지요.”

, 그렇군, 그래서 내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전하, 제가 이 아이를 맡아서 키웠으면 하옵니다. 제 고향 장성으로 내려가 한동안 조용히 이 아이에게만 집중 하겠나이다!”

, 그렇지만, 갑자기 자네가 귀향을 한다면, 의심하는 자들이 있을 터인데... 어쨌든, 알겠네, 그리하시게! 문제가 되지 않게 과인의 선에서 처리하도록 하지.”

나는 중신들이 신경 쓰였지만 그의 귀향을 허락했다. 부정을 하나 만들어 관직에서 파면하는 식으로 그를 보내주었다.

부디, 그 아이를 좋은 인재로 잘 키워주시게!”

, 전하! 본부 받들겠나이다. 전하, 만수무강하시옵소서!”

홍 판서는 큰 절을 하고 물러갔다.

 

전하, 영실대감과 홍길동 들었사옵니다!”

홍 판서가 떠나고 며칠 뒤 밖의 내관이 외쳤다.

, 돌아왔는가? 성공했나보군, 어서 들라하라.”

전하, 돌아오는 길에 잠시 일이 있어서 며칠 늦었나이다! 용서하시옵소서!”

영실대감의 시간이동 술이 성공하였고, 난 홍 판서의 그 아이의 장성한 청년의 모습을 보러 갈 수가 있었다. 홍 판서는 이미 그 년도엔 죽고 없었다. 내 존재를 숨긴 채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신기하게도 그 아이의 이름도 홍길동이었다.

홍 판서도 아이의 이름을 길동으로 지었구먼!’

우연치곤 신기했다. 어쨌든 그때 그 자와 어울리며 그 검무도 맞춰보는 사이도 되었다. 이 청년이 내가 아는 홍길동과 연관되었음도 직감했다.

자네, 혹시, 저 보름달이 뜨는 날엔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가?”

아니 그것을 어떻게? , 이것 때문에 아주, 매번 곤욕이지요. 악몽까지 꾼다니까요.”

내가 아는 홍길동은 보름달이 뜨면 좌측 팔이 떨렸지만, 이 자는 우측 팔이 떨리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게다가 꿈도 비슷한 것을 꾸는 걸 보면, 이 자가 길동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홍길동 청년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할 듯 했다. 더 머물면서 내 곁의 길동이가 그곳의 길동이 거둔 개똥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뭔가 더 알아야 할 것들이 더 있을 법했다. 그러나 온전치 못한 시간이동 술은 나에게 더 이상의 시간은 허락지 않았다. 난 다시 내가 살던 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바쁜 업무에 지금까지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형님과 함께 길동 그 자를 만나게 된 그 때...’

이도는 생각을 이어가려다 다시 2016년 경복궁으로 눈을 돌렸다. 일단, 양 검으로 포박되어있는 왕실장이라 불리는 장녹수부터 처리해야했기에...

전하, 신 전우치, 도착했사옵니다.”

누군가 소리치며 구름을 타고 내려왔다. 삼형제 중, 막내 길동도 정신을 차릴 무렵이었다.

자네, 뭐하다 이제 왔는가?”

아이 참, 너무 빡빡하게 그러지 마쇼! 저도 한참 기다리다 온 거에요. 전하는 너무 빡빡하시다니깐? 개똥, 아니지 길동이 오랜만이야.”

전우치는 길동과 이도에게 정신없는 인사를 건넸다.

개똥이라니, 이놈! 이 길동성님을 몰라보는 것이냐?”

분명, 막내 길동으로 돌아왔을 텐데, 아직 도적 홍길동의 말투였다.

, 형님! 죄송합니다. 이 아우, 우치가 오랜만에 형님을 뵙나이다!”

전우치는 이도보다 홍길동을 더욱 무서워하는 듯 재빠르게 내려와 고개를 숙였다.

그래, 별일은 없었고? 우치 아우!”

홍길동은 아주 근엄한 표정으로 목을 끓여가며 말했다.

흐으음, 우치야~! 새겨들으라. 난 너의, 큰 형님, 홍길동이니라~!”

길동은 배를 잡고 깔깔댔다. 그 말에 눈치 챈 전우치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개똥이 이놈이 돌았나? 엇다대고 큰 형님 행세여? 나랑 해보자는겨? 내가 무서워할 줄 알고?”

방금까지 겁나 무서워했음서, 이제와 뭘 그러냐?”

길동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고, 우치는 계속 씩씩댔다.

으이그, 고주망태 영감이 사람 여럿 망쳤다니까?”

그 영감탱이 얘긴 꺼내지도 마! 나도 짜증나니까!”

싸우는 건지 뭔지 모르는 두 친구간의 고성방가가 오가자 이도는 한숨을 한번 내뱉었다.

자자, 그만, 그만, 인사는 그쯤 해라! !”

항상 그렇듯 이도가 중재했다.

아 놔, 왜 내 주변에는 다 이런 애들만 있어?”

저는 어떻사옵니까? 전하!”

자네도 작작 좀 허시게, 작작 좀!”

어느새 다가온 영실영감이 묻자 이도는 또 다시 성질을 죽였다. 사실 개똥이었던 길동과 우치, 이 둘은 도적 홍길동이 거둔 아이들이던 것이다. 물론, 만나면 항상 이렇지만...

친구사이가 다 이런 게 아닌가? 서로 툴툴대지만, 어려울 땐 힘이 되어주었다.

이보게 우치, 일은 어찌되었는가?”

이도는 이제 화제를 바꿔서 우치에게 물었다.

, 전하! 알아냈사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것을 보시옵고, 돌아가는 대로 상세히 보고하겠나이다.”

우치는 두루마기를 건넸고, 이도는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각, 왕실장인 녹수는 이도와 길동이 휘두른 두 칼에 포박당한 채 엎어져있었다. 그 곁으로 보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대, 나를 기억하겠는가?”

녹수는 기억이 나지 않는지, 한참을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누구냐, ? 난 네까짓 것은 관심 없는데?”

녹수는 괜한 발악을 하듯 말했다.

하긴, 네까짓 게 남자나 홀릴 줄 알지, 뭘 기억 하겠느냐? 이 요망한 것!”

보명은 녹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다 망쳤다! 연산군 마마는 다 너 때문에 망친 것이야!”

보명은 녹수의 뺨을 사정없이 때려가며 눈물을 흘렸다.

네깟 것만 없었어도 마마는, 이 나라는...”

울음이 터져 녹수의 뺨을 때리던 손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만 됐다, 보명아. 그쯤이면 되었어!”

다가오는 이도는 보명을 달래주었다.

그래, 울지 마. 미주야.”

준상도 다가와 그녀를 안아주었다. 미주는 말없이 준상 품에서 잠시 눈물을 훔쳤다.

 

이도는 녹수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런 짓들을 계속해나가는 것이냐? 연산군 한명으론 부족한 것이냐? 아무 죄도 없는 길동과 그 가족은 왜 또 이렇게 노리는 것이야? 길동에게 무언가라도 있는 것이냐?”

녹수는 대답했다.

그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오? 저 길동은 그대와 함께 연산군마마의 원수란 말이오! 단지 원수를 갚으러 왔을 뿐...”

이도는 대답이 영 못마땅한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젠, 사실대로 말해 보거라! 그 연산에게 붙어있던 그 요괴는 어디로 사라졌지? 지금 이곳에서 하던 짓도 그 요괴가 시킨 것이렸다?”

녹수는 이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 작정한 듯 보였다. 얼마 전 청문회의 증인들처럼 말이다.

대답을 할 생각이 없겠지. 이럴 줄 알고 내 준비한 것이 있지!”

이도는 용포 안에서 하얀색 덩어리를 하나 꺼내들었다.

죄인 장녹수를 포박하라!”

이도는 그 덩어리를 하늘높이 들어 외쳤다. 그러자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마구 몰려들었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고, 그 먹구름은 점점 일행들의 하늘위로 모여 들었다. 얼마 후 구름들은 회색빛을 넘어 한 점의 짙고 짙은 검은 점이 되었다.

우광쾅!

그 구름에서 길고 날카로운 얼음덩어리가 떨어졌다. 한 겨울의 고드름이었다. 정확하게도 그 고드름은 녹수의 몸에 내리꽂혔고, 동시에 녹수는 사라졌다.

어디로 사라진 거죠? 도망치게 하신 거에요. 설마?”

준상은 놀라 물었다.

, 차가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게냐? 감옥으로 보냈을 뿐이다. 지금쯤 동장군한테 보내져 고생 꽤나 할 것이야. 그전부터 밑에 부대장격인 칼바람이라는 자가 녹수 그 요물을 아주 벼르고 있었거든. 어쨌든, 이제 과인도 돌아갈 시간이 되어서 말이야. 여기서 이젠 지체할 시간이 없어. 왔으니 프로레슬링이나 좀 봤으면 했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구나.”

이도는 손에 있는 하얀 덩어리를 털어가며 말했다.

전하, 전에 그 서랍장에다가 VR 플레이어로다가 구해놓았사옵니다! 그것을 보시옵소서!”

, 역시 영실대감은 센스쟁이~ 그런 건 좀 즉각 말해주거라!”

이도는 신이 나 말했다.

짐은 이제 돌아가겠네. 영실대감, 길동아, 마무리 잘 하고 그곳으로 가 있거라!”

예 전하~! 편히 가시옵소서!”

먼 훗날, 봅세나!”

이도는 영실과 길동에게 나중을 기약했다.

, 오랜만에 정내관 눈치 안보면서 잘 놀았네 그려~! 정내관 있었으면 으휴, 그 싸대기질, 싫다 싫어! 이 얼마나 좋은가?”

이도는 호탕하게 웃으며 돌아갔다. 그 뒤를 젊은 내관이 시끄럽던 등장음악을 다시 켜며 따랐다.

 

11. 한줌의 휴식

 

나는 눈을 떴다. 어느 방 안, 침대 위였다.

, 여기는...”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내방이었다.

낯익은 침대, 낯익은 천장, 낯익은 책상, 모든 것들이 아련한 것들이었다. 어린 시절, 행복했던 순간들이 방안에서 마구마구 스쳐지나갔다. 눈물이 흐르면 그 순간들을 선명하게 못 볼 것 같아서 간신히 참았다. 침대 옆에서 쪼그리고 잠든 사람이 보였다. 어머니였다. 나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세히 보니, 어린 시절 그때의 어머니 모습이었다. 그리고 거울을 보니 내 모습 또한 그 일이 있기 전의 어린 나였다.

준서 일어났구나?”

얼마 후, 일어나신 어머니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준서야, 고생 많았지?”

어머니의 얼굴엔 눈물이 글썽이셨다.

아니에요, 울지 마세요! 고생은요.”

난 어머니의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 열심히 살았어요! 우리 가족 그렇게 되고, 정말 절망적이었지만... ... ...”

어머니는 날 안아주셨다.

그래 우리 큰 아들, 준서야, 엄마가 다 알아! , 미안해.”

날 안은 어머니의 몸이 떨렸다.

아니에요! 엄마 잘못이 아니에요!”

난 어떻게든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덜어 들이고 싶어 말을 계속 이어갔다.

저 결혼도 하고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동생들하곤 헤어져 지금까지 못 챙기며 살아왔지만요.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면서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제 아들 서진이한테도 좋은 아빠가 되고, 나중에 할머니나 삼촌들도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소개시켜주려고,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근데, 근데, 사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사는 거더라고요. 그러니까, 엄마도 너무 저희한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되요.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이신지는 모르지만, 행복하셨으면 해요. 엄마...”

에구 준상이랑 비슷한 말을 해주는구나. 내 새끼, 내 새끼들, 다 착하게 자라줘서 고마워. 그리고, 그래서 엄마가 더 미안해...”

그러지 마시라니까요.”

나와 어머니는 그렇게 한동안 부둥켜안고 서로 미안하다며, 서로 괜찮다며, 서로를 위해 울었다.

준서야, 늦었지만 이제, 너의 가족들도 되찾아보렴. 더 늦어서 돌이킬 수 없기 전에...”

이미 찾았잖아요. 준상이와 우리 막내...”

아니, 유미와 서진이 말이야!”

나는 드릴 말씀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너라면, 네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을 거야! 넌 내 아들이기도 하니까! 자신을 좀 더 믿어보렴! 유미도 거기에 응해줄 거라 믿어...”

곧 내 방 공간은 옅어지며, 어머니도 점차 사라졌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남기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어머니, 저희에게 맡겨주세요!”

 

곧 짧지만 포근했던 내 꿈은 끝나고 잠에서 깨어났다.

형님, 깨어났군요? 다행이다!”

날 보며 놀라 상기된 동생 준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준상이었구나! 무사했었어! 다행이다.”

, 막내도 무사했어요. 다행히...”

 

준서는 아직 몽롱하게 누워 자신이 폭주했을 때의 일을 준상에게 전해 들었다. 대부분은 기억에 있었지만 왕실장이란 것에게 휘둘려 사람들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기억에 없었다.

, 나도 아버지와 같은 짓을 해버린 건가?’

준서는 예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아버지도 나처럼 누군가에게 조종당했던 게 아닐까? 아버지도 마지막엔 나처럼 주저하시지는 않았을까?’

준서는 의문을 품었다.

그 왕실장 그놈은 주저하던 형님한테 아버지와 비슷하다고 했어요. 혹시 왕실장이 아버지도 조종했던 것 아닐까요?”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어쨌든 일단락이 되었으니 좀 쉬세요. 형님. 잘 쉬시고 이쪽에서 뵈어요. 중요한 것 같은데, 이 편지도 읽어보시고요.”

준상은 그 말을 끝으로 책상에 쪽지하나를 두고 집을 나섰다. 준서가 아직 비몽사몽 주변을 보니, 그가 있는 곳은 이젠 유미와 서진이의 흔적만 남은 준서의 집이었다. 한숨을 쉬며 멍하니 있던 준서의 눈에 책상에 올려진, 뜯어보지 않은 편지봉투가 들어왔다. 준상이 두고 간 쪽지 옆에 놓여있었다. 영어로 발신지 주소가 적혀있는 약간 색이 바랜, 누렇게 된 하얀 편지봉투가...

 

내 사랑하는 남편, 준서씨에게...

 

여보, 서진아빠! 잘 지내는지 모르겠네.

당신의 변화를 피해서 이곳 캐나다 유진이네 온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네.

서진이는 이제 많이 나아졌어.

당신이 걱정하던 서진이 간질은, 의사말로는 이제 호전 중이래. 1~2년 정도 재발만 안 되면 이젠 괜찮을 거래.

당신이 그랬지? 이렇게 변해가는 당신 신경 쓰지 말고 멀리 떠나서 살라고!

그래, 그땐 정말 당신도 싫고 그 상황 전부 다 싫었었어!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당신 말대로 서진이 데리고 신경 안 쓰고 살고 싶어서 왔는데...

그래도 서진이 생각만 하면 눈물을 흘리고 하는 당신 생각이 계속 눈에 선해서 잠도 잘 못자겠더라.

서진이도 아직 아빠를 부르는 것 같고 말이야.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당신의 그 병도 고쳐지면 찾아와줘.

이렇게 당신 힘든데, 서진이랑 이렇게 멀리 떠나와서 편히 지내서 미안해.

당신의 마음의 병이 고쳐지길 매일 기도할게!

아직도, 꼭 그렇게까지 자신을 망가트렸어야 했는지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아.

하지만 그것 또한 내가 사랑한 당신의 모습일 테니까, 인정하려 노력하는 중이야.

그리고 이 편지를 읽었다면 아직 희망이 있는 거잖아?

, 읽는 당신의 모습이 있길 기도할게! !...

그리고 오랜만에 할게! 부끄럽지만 할게. 오글거려도 참아줘.

 

사랑해 요보!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 유미와 당신아들 서진이가-

 

편지지엔 수많은 눈물자국이 글씨들 사이로 군데군데 물결치고 있었다. 준서의 눈물도 그런 유미의 눈물이 그리웠는지, 왈칵 편지지에 쏟아져 마중을 나갔다. “요보!”

연애할 때부터 유미가 그 말을 할 때의 그 사랑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한마디 읊조렸다.

, 나 같은 건 이제 잊으라니까. 이 착한 여자는 왜 이렇게...

준서는 눈물을 한동안 멈출 방법을 몰랐다.

그러나 아직, 이 상태로는 유미와 서진에게 갈 수 없어. 내겐 맘 속 응어리도 풀고, 무엇보다 할 일이 있으니까!’

준서는 메인 목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일단 이곳부터 가보자!’

준서는 일단 준상이 남긴 쪽지에 적힌 주소로 가보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그때! 치잉~!

 

아주, 눈물겹군 그래.”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검 하나가 또다시 준서의 목에 다가왔다. 이번에도 저승사자가 든 검이었다.

그래, 이제 좀 제정신으로 돌아왔나? , 이제 정산할 시간이다! 이 검 기억하지? 소멸의 검!”

저승사자는 준서에겐 여전히 차가운 말투였다.

저에게도 기회를 주시면 안 될까요? ,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준서는 침착하게 부탁을 했다.

기회라면 지금까지 받은 것도 분에 넘친다 생각 안 되나? 더 이상의 뭐가 또 필요하다는 것이냐?”

준서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와 누군가에게 조종당해 가족이 흩어지고 계속 갑질러들에게 가정을 지킬 수 없던 속사정을 저승사자에게 털어놓았다.

그런 것 쯤, 이미 그때 너의 머릿속 영상에서 다 보았지 않았느냐? 허튼수작 말거라!”

저승사자는 칼날을 목 가까이 더욱 더 밀어붙였다.

믿든 안 믿든, 어쩔 수 없어요. 그땐 이 사회에 대한 분노에 가득 차 복수에 눈이 멀었지만, 지금은 좀 더 냉정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제겐 이제, 형제들도 다시 생겼으니까, 전과 같진 않을 겁니다.”

준서는 뭔가 결의를 하듯 단호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지쳤어! 오랜 세월동안 자네 같은 사람 한명 없었겠나? 이번엔 좀 제대로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만 있을 뿐이지!”

한숨을 한번 길게 내쉰 저승사자는 여전히 검을 겨눈 채로 말했다.

좋다! 한번만 더 기회를 주지. 대신!”

 

으아아악!

다음순간, 준서는 고통스러워 소리쳤다.

너에게 기회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주겠다! 그러나, 나도 안전장치라는 걸 해둬야지 않겠나?”

저승사자는 검을 준서의 몸 안으로 쑤욱 집어넣었다. 검은 몸을 찌르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흡수가 되듯 빨려 들어갔다.

허튼 수작하면 알지? 그 소멸의 검이 너에게 판결을 집행할 것이야! , 자동 집행 장치인 셈이지...”

쓰러져 아파하는 준서를 두고 저승사자는 공중에 뜨더니 이내 천장위로 사라져갔다.

강준서! 정말, 이번엔 날 실망시키지 마시게. 망토와 정화의 검은 다시 빌려 쓰게나. 자네 동생이 옷장 안에 잘 넣어두었으니...”

저승사자는 하늘 위로 올라가며 생각했다.

정녕 그 검이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잘 되겠지 뭐, 이번엔. 아 몰라 배고파. 햄버거세트나 먹으러가야겠다.’

준서의 통증은 서서히 가라앉고 준서의 왼쪽 팔목엔 작은 검 모양의 작은 표식이 자리 잡았다.

, , 저 먹보탱이! 완전 벼르고 있었어! , 아파라...’

덕분에 정신을 차린 준서는 망토를 꺼내 입고, 동생 준상이 준 쪽지에 적힌 장소로 날아갔다.

 

세종시대, 어느 보름달이 뜬 밤. 길동이 이번에도 달을 보고 있다. 그러나 전처럼 멍하니 있지도, 한쪽 팔을 떨지도 않았다. 그냥 여유롭게, 혹은 뭔가 애틋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방님, 이제 멍 안때리십니까요?”

초희가 장난스런 말투로 다가왔다.

, 이제 아무렇지도 않네? 참 신기하지? 말끔해졌어! 예전 밀크셰이크를 좋아하던 그때의 기억도 점점 돌아오고 있고 말이야!”

초희는 길동의 얼굴 앞으로 다가가 그의 두 볼을 두 손으로 꽉 누르며 장난쳤다.

거봐! 내가 뭐라 그랬어? 다 기억나고 다 만날 거라고, 했어요? 안했어요? 서방님? ? 밀크셰이크라는 것도 좀 가져와봐 길똥서봥~!”

어억, 아퍼~! 살려죠!”

길동의 볼을 누르던 초희의 손이 떠난 후 길동은 몇 번 콜록댔다.

, 죄송합니다. 마님! 쇳내, 앞으로는 마님말씀 새겨듣겠나이당! 곧 밀크셰이크도 공수해옵죠! 예이예~”

그리고는 둘은 같이 웃어댔다.

, 근데 서방! 아주머님들한텐 진짜이름은 들었어?”

, 들었지. 근데 아직 그 이름은 낯설기만 하네...”

뭔데, 뭔데? 말해줘 봐!”

, 성은 강이고 준할 준에 별 성자를 써서 준성이라더라.”

우와! 강준성! 뭔가 장엄하고 거대한, 좋은 이름인데? 역시 우리서방님 이름다워!”

형님들도 잊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형님들 기억 속에 메시지를 남기셨나봐.”

? 어머니?”

초희는 놀라며 물었다.

, 형님들 기억 속에 메시지를 남기셨나봐. 우리 셋이 모이고 세상에 대한 응어리를 다 풀면 예전 그 숲의 집으로 오라고 말이야! 그래서 형님들, 특히 큰 형님의 응어리를 풀러 갈 거야. 초희 넌, 네 동생 균이랑 같이 그곳으로 가있어! 이제 균이도, 아니지 이제 교산대감이라 해야겠더라. 어쨌든 동생도 때가 다되었을 거야! 전하께 내가 얘기해놨어!”

초희는 그 말에 길동 품안으로 안겨들어 울먹였다.

길동 서방, 아니지 준성서방님! 고마워. 고마워요!”

아이 뭘 그래, 내가 더 고맙지, 내 곁에 있어줘서. 사랑해 초희야!”

그렇게 그들은 은은한 달빛아래에 입을 맞추며 한참을 껴안은 채로 있었다.

 

12. 멀대의 사랑

 

어느 건물 옥상에 준상과 미주가 나타났다. 눈부신 햇빛이 비추는 서울의 촘촘한 회색빌딩 숲이었다. 그중에서도 그들이 나타난 곳엔 커다란 원 안에 H 라는 글씨가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다.

춥다! 아직 오려면 좀 있어야 할 거야! 미주야 들어가자 일단! 아래층에 커피숍 있어.”

둘은 떨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건물 안, 미주와 준상은 몸을 녹이려 종이컵 하나를 들고 서있다.

이게 커피숍이야?”

미주는 입술 한쪽을 올리며 말했다.

, ! 저 자판기 맛있기로 소문나있거든? 무인 커피숍이야 이정도면~!”

준상은 웃으며 말했다.

왜이래 우리 둘만 있으면 여기가 최고의 커피숍이징~!”

준상은 윙크를 날렸고, 미주는 그 모습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 이 밀크커피를 보니까 생각이 나네!”

누구? 전 남친?”

아니~ 이 바부야! 뭐래? , 전 남친들은 셀 수가 없지만~!”

준상이 의심하자 미주는 일부러 새침하게 말했다.

근데, 미주야, 궁금한 게 있는데, 네 진짜 이름이 보명이야? 어쩌다가 가명까지 쓰게 됐어? , 네가 써서 그런지 둘 다 예쁜 이름이네. 이보명! 최미주! 둘 다 잘 어울려...”

미주는 준상의 그 말에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건, 좀 사연이 있어...”

미주는 주머니에서 구슬을 하나 꺼냈다.

이건 좀 먼 미래의 이야기긴 한데, 지금쯤 어디까지 진행됐을라나? 어쨌든, 우리 아버지가 왜를 피해서 날 미래로 보냈을 때였어. 준서 너와 만났던 이곳으로 오기 전, 왜를 따돌리기 위해 잠깐 들렸던 시대야. 지금보단 먼, 미래의 시대야. 도착하자마자 그 시대까지 쫒아온 왜놈에게 습격당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구해주셨어. 그 왜놈을 때려잡는 모습이 마치 액션배우의 몸짓처럼 멋졌어. 암튼 이건 그 할아버지가 해준 이야기야. 자판기 밀크커피 얘기도... 원래 이건 오르골 형상이었거든. , 뭐였더라?”

미주는 맑은 녹색 빛을 내는 구슬을 꺼내며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이어서 말했다.

누구에게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하나쯤은 있다. 그 사랑의 구슬픈 가락은 오르골 리듬에 담겨 마음 속 깊숙한, 어느 한자리에 자리 잡는다.”

미주는 구슬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준서는 물었다.

어때? 멋있는 말이지? 그 할아버지가 해준 말이야! 이제, 내가 이름을 미주로 바꾼 이야기를 해줄게.”

너랑 참 많이 비슷한 사람의 이야기야.

미주는 준상을 보며 한순간 말없이 미소 지었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하나쯤은 있다.

혹자들은 그것을 짝사랑, 혹은 첫사랑이라고 부른다.

그 사랑의 구슬픈 가락은 오르골 리듬에 담겨 마음 속 깊숙한, 어느 한자리에 자리 잡는다.

 

한참동안의 침묵을 깨고 노인이 옆에 앉은 보명에게 물었다.

조금은 괜찮으냐? 지금 갑자기 뜬금없는 말이긴 한데...”

노인이 물병하나를 보명에게 주며 말했다. 그 노인이 주저하자 보명은 고개를 들어 듣고 싶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 혹시 자네도, 사랑에 가슴 아픈 적 있나?”

보명은 아직 숨이 차 아무런 말도 못했지만 무언의 반응을 보이며 물을 마셨다. 그렇게 노인은 이어서 말했다.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그런 사랑하나쯤은 찾아오거든. 한 인생에 있어 그것이 크든, 작든 말이야. 그 사랑의 구슬픈 가락은 오르골 속에 담겨 마음 깊숙한 곳, 어느 한자리에 자리 잡게 되지. 그러다 어느 순간, 그 기억의 샘이 솟아오르게 되는 것이야! 이 오르골처럼 말일세.”

노인은 오르골을 꺼내 열며 말했다. 그것은 구슬픈 가락을 뽐내었다.

괜찮다면 이 노인네의 이야기를 좀 들어주겠나?”

보명은 고개를 끄덕였고, 노인은 손가락으로 [대림]이라고 쓰인 빛바랜 간판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기 저 간판은 오래전, 저기 저곳이 대림역이라 불리던 한 전철역의 것이었지. 이 지역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로 불렸을 때 말이야. 지금은 내가 얼마 전까지 소속되었던 스피닝 부대의 발사대로 사용되지만 말이야! 내겐 추억이 깃든 장소라 일부러 난 저걸 없애지 않고 한구석에 잘 걸어두게 했네.”

 

[이번 정류장은 대림, 대림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온수나 부평구청, 장암방면으로 가실 분들은 이번 역에 내리셔서 7호선으로 갈아타주시길 바랍니다. This stop is DAERIM, DAERIM station. The door’s on the right. Watch your step... ...]

지하철의 안내멘트가 나왔고, 한 노인이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지하철 출입문 앞에 서 있었다. 곧 문이 열리고, 그는 지팡이를 한쪽 다리삼아 절뚝절뚝 걸어갔다. 열리는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냉기가 그의 몸을 감쌌지만 그의 달아오르는 마음을 얼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지하철에서 나온 노인은 창가의 한 벤치를 보며 가만히 걸음을 멈췄다. 타고 내린 사람들이, 그리고 전철도 사라진 그 후에도, 얼마간은...

나 왔어, 미주야, 드디어...’

 

[경보! 경보! 적의 침입에 대비하라! 적의 공격에 대비하라! 각 부대는 출진준비를 하라! 출진준비를 하라!]

외계인부대가 지구 앞에 포진하자, 경보가 울렸고 여러 부대들의 출진준비가 한창이었다.

그 중에 하나,

스피닝 부대, 발진!”

자전거를 탄 한 부대가 밝은 빛을 내며 지구 위로 발진했다.

좋아! 또 운동한번 화끈하게 해보자고!”

! ~!”

우리 스피닝 부대의 승리의 영광을 위하여! 개선 곡, !”

부대장이 외쳤고

!”

나머지 부대원들도 따라 소리쳤다. 앞에서 이끌고 있는 장군과 그 밑 부대장을 비롯한 부대원들 모두 자전거의 손잡이를 붙잡고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빛나는 태양, 끝없는 지평선!... ...

개선음악을 시작으로 신나는 음악들이 차례차례 흘러나왔다. 모두 흐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페달을 더욱 더 힘차게 밟았다. 페달을 밟는 그들의 몸은 하나같이 점프를 하듯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페달을 밟을수록 앞의 바퀴는 빠르게 돌아가며 전자파가 일어났다. 하나의 바퀴는 여러 대원들의 것들과 연결되어 커다란 전자파를 생성했다. 거대한 타격포의 에너지파로 쓰일 동력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에너지파가 완성될 때까진 시간이 조금 걸렸다.

! ! 쓰리! !”

그 동안은 부대장의 기합소리에 맞춰 이리저리 뻗는 대원들의 팔에서, 혹은 몸 전체에서 발사되는 기공포가 적의 진격을 막아냈다. 얼마 후, 타격포의 에너지가 가득 채워졌다. 그 에너지 파는 순식간에 적들을 청소해갔다. 남아있던 적, 잔당들은 어쩔 수 없었는지 퇴각했다.

, 소탕 완료! , 소탕 완료! 각 부대는 재정비 후 일상으로 복귀하라! 일상으로 복귀하라!”

노장군의 보고로 그렇게 적의 기습은 마무리됐다.

 

이번에도 수고하셨소! 은퇴까지 수고가 많구려~! 그래 그, 전에 말한 그대의 소원이라는 것이 무엇이오?”

용상에 앉은 임금이 무릎 꿇고 있는 백발이 무성한 장수에게 물었다.

, 전하! 한 가지 제 소원은, , 오래 전 가을과 겨울, 그 서너 달쯤 되는 시간 속으로 잠깐 다녀오는 것이옵니다!”

장수는 대답했다.

, 고작 그런 것이 소원이란 말이오?”

임금은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 전하! 저에겐 소중한 소원중 하나이옵니다!”

장수는 뭔가 보물을 숨겨놓은 아이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 각자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겠지. 알겠소, 시간이동 술을 허락하겠소! 다녀오시오!”

백발의 장수는 이 임금 밑에서 수많은 공적을 세웠다. 이제는 은퇴를 앞둔, 그러나 마지막으로 승리하기 힘든 전쟁의 선봉장으로서의 출정을 앞두고 있다.

감사 하옵니다, 전하! 출정준비를 마치고, 그곳에서 바로 출정하겠사옵니다!”

그리하시게!”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장수는 큰절을 올리고 사라졌다.

, 사람하고는...”

임금은 장수가 사라진 빈자리를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판기 속 배열된 음료수 캔들이 그의 눈을 스쳤다. 그리고 네 글자가 그의 눈을 멈추게 했다.

[밀크커피]

노인은 한번 씨익 웃으며 동전 몇 개를 투입구에 넣고 밀크커피 밑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오랜만이네 이 맛, 네가 좋아하던 거였는데, 미주야, 그치?’

노인은 옛 생각에 미소 지으며 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제 곧...’

노인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지하철이 지나간 대합실엔 아무도 없었다. 10시가 넘은 시각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이제 곧 그들이 올 것이다. 노인이 기다리는 그들이 올 것이다.

장군님, 아직 결함이 조금 있지만, 여러 가지로 쓸모가 있을 겁니다! 몇 번 안 되지만 전에 말씀드린 그 멈춤 기능도 추가로 완성시켰고요! 미리 은퇴선물 드립니다! 함부로 쓰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장군님! 즐거운 여행 되십쇼!”

노인은 부대장이 준 시간조절장치를 꺼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과학수재 중 한명인 부대장은 노인에게 은퇴선물로 만들어 준 것이다.

이제, 얼마 안 남았군, 이 기능도...’

어느 순간, 노인의 얼굴은 경직되고 그의 몸 구석구석에 지진이 일었다.

왔구나!’

남현이 걔는 왜 이렇게 많이 마시는 거야? 사람 피곤하게! 안 그래?”

그러게, , 피곤하게, 뭐 잘 가겠지 뭐...”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두 남녀가 계단을 올라오는 뒷모습이 노인의 눈에 비쳤다.

 

하얀색 떡볶이코트에 뒤로 멘 검은색 프라다가방, 굽 낮은 구두에 청바지와 회색 폴라 스웨터에 살짝 걸친 털목도리, 그리고 그녀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모든 것이 노인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노인은 그 모습을 보자니 얼어붙은 손가락이 떨려 가벼워진 종이컵을 떨어트릴 뻔 했다. 컵을 급하게 쓰레기통에 버리고 노인은 자판기 옆으로 숨었다. 그 두 남녀는 노인이 서있던 벤치에 앉았다.

전철 오려면 아직 좀 멀었네?”

여자는 말했다.

그러네?”

남자는 왠지 기분이 좋아보였다.

 

근데 있잖아, 내 머리 어때? 괜찮아? 예뻐? 너무 칠렐레 팔렐레 한 것 같지 않아?”

, 아니야! 괜찮아, 괜찮은데 왜?”

아니야~, 너무 파마가 쎄게 된 거 같단 말야.”

, 그런가?”

너 칠렐레 팔렐레가 뭔지나 아는 거야?”

, , 어쨌든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여자의 말에 옆의 남자는 계속해서 변명스러운 대답들을 가까스로 이어나갔다.

, 뭘 해도 사랑스러워.’

노인은 그 광경을 훔쳐들으며 생각했다. 어쨌든, 회장님의 비서처럼 졸졸졸 따라다니며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나 보이는 남자였다.

민혁아~! , 나한테 컬러링 선물해줄래? 미진이가 벨소리는 보내줬거든.”

그래? 알았어~! 컴퓨터로 네가 좋아하는 걸로 보내줄게!”

남자는 웃으며 재빠르게 대답했다. 자신이 또 뭔가 해줄 수 있어서 꽤나 좋은 모양이었다.

, 바보 같군 그래!’

노인은 피식 웃음이 났다. 이 순간은 노인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VR 영상인 셈이었다. 노인은 버튼하나를 누르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 남녀는 그 시공간과 함께 얼어붙듯 멈춰졌다.

 

사실, 임금의 허락 후 처음으로 온 건 이곳이 아니었다. 처음 장소는 이보다 앞선 구월의 어느 주말, 인천역 앞이었다. 여러 벤치 중 하나에 앉은 여자 셋이 보였다.

미주야!’

내 눈은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곱슬머리에 프라다 가방을 메고, 회색, 검은색 줄무늬 상의에 청바지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 어떤 멀대같은 사내가 그 앞을 지나쳤다.

, 저때, 저 저...’

난 안타까움에 절로 한숨을 쉬었다. 곧이어 흐린 기억 속 동아리 선배들과 동기들이 파릇파릇하게 내 앞을 이러 저리 스쳐지나갔다.

후훗, 참 어렸네, 다들!’

나는 지팡이를 두 손으로 잡으며 조용히 웃었다. 이날은 내가 소속된 사진동아리에 그녀가 들어오고 2학기의 첫 야외 촬영 날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첫 눈에 사랑하게 된 날이었다.

 

, 무리가 다 모여 인천역을 떠났다.

다른 곳으로 가시겠습니까?”

지팡이는 내게 물었다.

아니, 조금만 저 무리를 따라 다녀보고 싶어!”

그러자 지팡이는 내게 의자모양의 이동수단을 만들어주었고, 그 시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투명 막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편하게 그들을, 정확히는 그 속의 미주와 그 멀대를 곁에서 잠시 지켜보았다. 그 무리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카메라를 들이댔고, 점심때는 차이나타운에 있는 한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그러고 있으니 뭔가, 찍어놓은 영상물을 모니터하는 감독이나 배우가 된 느낌이었다. 오후엔 영종도로 가, 마저 사진촬영을 했고 놀이기구도 탔다. 그 멀대와 미주는 디스코 팡팡에 나란히 앉았다.

장군님! 괜찮으십니까? 어디 불편하신가요?”

괜히 그 모습을 보자니 창피함이 스멀스멀 올라와, 내 얼굴을 빨개 트려 놓은 것이다. 지팡이는 내 심박수가 올라가니 진단모드가 되어 날 진찰했지만 당연히 별 문제가 없었다.

괜한 진료 안 해도 괜찮아!”

난 지팡이를 자제시켰다. 그리고 난 몇 시간 뒤의 부평역으로 갔다.

 

만취되어 일행에게 업혀오는 낯익은 여자가 보였다. 미주었다.

그래! 저거야! 저 안쓰러운 모습에 더 끌렸던 것 같아!’

나는 그 멀대가 그녀를 대신해서 그녀의 표까지 사고 있는 상황에서 이젠, 그들이 탄 전철 안으로 넘어갔다. 그 멀대는 취한 미주를 계속 바라봐주었다. 급행이라 계속 다음 역은 구로라고 떠있는데, 흠뻑 취한 미주는 왜 계속 구로냐고 물어보며 정신을 못 차렸다. 지금 봐도 그 모습은 내겐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그 구로에서 멀대가 내리고 난, 자연스럽게 그 자리로 가 멀대 대신 그녀의 모습을 또 조용히 바라봐주었다.

민혁아~”

날 그 멀대로 착각하는 건지, 미주는 날 취한 눈으로 가끔씩 이름을 부르며 웃어주었다. 그러곤 바로 고개를 숙였지만...

난 그녀가 신림역 그녀의 가족이 있는 좁아 보이는 집까지 가는 동안 지켜보았다. 같이 간 동기들도 각자 집으로 가야했기에, 전철역에서 전부 흩어졌다. 혼자 남은 그녀의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 뒷모습은 참으로, 그 뒷모습은 뭔가에 찌든 모습이었다. 그 시절엔 몰랐지만, 이미 그녀의 사정을 아는 지금의 나는 그녀가 참 애달프기 그지없었다. 마치 바람이 불어오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꽃잎 같았다. 바로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저 바라볼 뿐 잠금 버튼을 그럴 용도로는 누를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녀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에 팔을 뻗었지만, 차마 내 양손은 그 뽀얀 얼굴엔 닿을 수는 없었다. 내 양손은 멈춰진 그녀의 볼 앞에서 덜덜 떨기만하다가 내게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취한 그녀는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지금의 난, 그 멀대와 다른 게 뭐야?’

갑자기 화가 났다. 눈물도 났다.

어차피 여긴 이미 내가 관여할 세계가 아닌데도,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난 그때처럼 무능력하구나...’

그때도 그냥 무능력한 놈이었다. 그래서 그때 그녀를 힘없이 보내주었다. 아니, 그녀 곁에 머무를 능력이 없던 내가 세월의 강물에 떠내려갔을 뿐이었다. 그 수많던 기회들 속에서도 난 그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멀리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는 미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두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차올랐다. 실은, 처음부터 이미 난 그녀를 가질 수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빠아앙~!

 

! , 빠아아앙~!

요란한 기적소리를 내며 무궁화호는 철로 저만치에서부터 달려와 터널 안으로 사라져갔다. 두 번째 장소는 간현이었다. 늦은 밤, 펜션 앞에 음료 상표가 새겨진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두 남녀가 보였다. 멀대와 미주었다.

미주야, 괜찮아? 많이 마셨어?”

아니야, 나 괜찮거든? 멀쩡하거든? 그냥, 그냥 좀 바람 쐬러 나온 거야.”

그렇게 둘은 한참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저 별들이 다 돈이면 얼마나, ! ! 내가 한심하지?”

? , 아니야, 왜 그런 생각해?”

빨리 말해! 나 한심하잖아! 이럴 때 돈이나 밝히고. 빨리 얘기, ~!”

검지를 뻗은 채 괜한 투정을 부리면서 미주는 멀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아니야, 네가 왜 한심해! 그냥 넌...”

멀대는 그저 밤하늘의 별만 올려다본다.

넌 그저 내 로망이었지...”

멀대가 못한 말을 대신 읊조리며 나도 그 시절에 봤던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멀대는 잠든 미주의 얼굴을 조용히 한참을 그렇게 바라만 보았다. 여자는 멀대의 어깨를 베개 삼아 머리를 살짝 뒤척이며 잠들었다. 멀대는 그저, 품 안의 아름다운 꽃이 시들까 조마조마했다. 멀대는 정원의 관리사처럼 미주의 헝크러진 머리카락들만 다듬을 뿐이었다.

, 목동이 따로 없었네 그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절로 읊조렸다. 하늘에선 별동별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고, 어느새 수많은 반딧불들이 불을 밝히며 다가와 그들을 감싸주었다. 잠에선 깬 미주와 옆의 멀대는 황홀한 광경을 같이 나누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은 손을 잡았고, 이곳저곳을 거닐었다. 그 순간은 무대를 활보하는 행복한 주인공 남녀였다. 강 위의 올려진 다리 위에 섰을 때였다.

이 광경 속에 너랑 들어오게 되서 참 좋아, 미주야!”

?”

, 넌 모르겠지만, , 처음 봤을 때부터 쭉...”

멀대는 용기를 내는 듯 했으나, 말을 할수록 점점 쭈뼛쭈뼛 망설였다.

그때,

좋아해!”

미주의 목소리였다.

나도 너, 좋아한다고! 바부양!”

그리곤 미주는 수줍어 웃어보였다.

, ?”

멀대는 살짝 당황했지만,

미주야~!”

다음 순간 그녀를 와락 안아주었다.

그렇지!’

꼭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던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매만지며, 서로의 입술에 닿았다. 반딧불은 계속해서 그 주위를 돌며 춤췄고, 하늘도 그들을 축복해 주려는 듯, 별똥별 비를 계속해서 내려줬다. 은은한 달빛조명은 그들을 잔잔히 비춰주었다. 곧이어 구름이 내려와 그들을 태우고 하늘을 날았다. 그 옆으로 지나가는 별똥별 비들을 그 남녀는 손을 뻗어 만지며 신기해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내겐 더할 나위없는 최고의 멜로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 빠빵~!

시끄러운 기차소리와 함께 눈부신 불빛이 날 덮쳤다.

으아악!

난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수그려 눈을 감았다.

 

몸을 펴며 눈을 다시 뜬 순간,

미주야, 추워 여기서 잠들면 감기 걸려, 이제 들어가자...”

화려했던 무대와 기차 불빛은 사라지고 다시 아까 그 자리였다. 미주의 옆,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멀대는 그녀를 일으켜 동기들이 있는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

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헛헛한 마음으로 나는 다시 이동했다.

 

다음 장소는 어느 병원의 영안실이었다. 여러 장소 한 구석,

그녀의 이름 앞에 이 한자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영정사진 자리에 그녀의 얼굴이 담긴, 검은색 줄이 양 갈래로 뻗은 액자가 보였다. 이젠 조금 나이를 먹은 동기들, 선배들,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 지인들이 그녀의 너무 이른 죽음을 애통해했다. 그녀와 제일 친했던 미진이는 뭔가를 손에 꼬옥 쥔 채로 고개 숙여 울고 있었다. 멀대와 그녀의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 남편의 가족들도 없는 듯 했다. 그녀의 가족들은 나를 보자 교수님으로 생각했는지 대접해주었다. 나는 미주의 영정 앞에 서서 국화를 바치며 사진 속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왔네? 오랜만이야, 너 많이 늙었구나?”

신기하게도 그녀가 내게 말을 걸어주는 것 같았다. 사진을 보니, 그것은 내가 찍어준 사진이었다. 저때의 그녀는 정말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였는데, 정말 행복한 표정이었는데...

남편이란 작자는 사진하나 찍어주질 않았나? 저 오래된 사진뿐인가?’

괜한 분노가 일어 남편을 찾아 때려주고 싶은 맘에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슬픈 표정을 짓고 검은 정장의 사람들 속엔 남편은 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부질없는 짓이란 걸 깨달을 뿐이었다.

 

그때, 간현을 다녀오고 얼마 후, 그 해가 넘어가면서 난 그녀 곁이란 무대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의 난, 그녀를 얻는 것보단 나의 앞으로의 먹고 살 길을 찾아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무엇보다 집안사정이 그랬다. 어중간한 4년제 수도권 대학보다 2년제 전문대학으로 옮기는 게 나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물론, 마음은 그녀 곁에서 언제까지라도 바보스럽게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더 이상 철없는, 여자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대학생 1학년 새내기로 있기엔 바람이 너무도 차가웠다. 비전이 보이지 않는 그 대학교를 그만두었고, 다시 전문대학으로 들어가 전문기술자가 되는 과정을 밟았다. 그것조차, 녹록한 사회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때 이후로 그녀와의 연락도 뜸해지다가, 결국엔 끊겼다. 후에 난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그녀의 결혼소식도 들려왔다. 그렇게 한동안 연락이 끊겼는데, 말도 안 되는 그녀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그것도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우연하게 동기 입을 통해...

 

동기 녀석은 그녀의 시신은 갑작스레 화장된 뒤, 바닷가로 뿌려졌다했다. 그런데 그녀의 사인은 무언가 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고, 장례식조차 시댁식구들은 참여하지 않았단다. 그 전부터도 부잣집에 시집 간 그녀에겐 소문이 무성했었단다. 시어머니에게 미움을 사고 집안에서 인정을 못 받았다는 둥, 시댁시구들의 계획 하에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식으로...

 

그것을 들은 내 속엔 울분이 올라왔었다. 그러나 소식을 들은 그땐 이미 내가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 직후에 알았더라도 별 다를 게 있었겠는가? 어쨌든, 그렇게 그녀는 내게 슬픔으로 남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엔 난 내 가족들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러다 외계인의 기습으로 내 아내와 아이까지도 잃고 시기에 빠져 있다가 지금 모시는 임금을 만났다. 여차저차하다 그분 밑에서 스피닝부대의 수장을 맡아 외계인에 맞서 오랜 세월을 전장에서 보냈다. 정말, 과거를 다 잊으려 몸부림친 세월이었다. 수많은 적들을 죽이던 세월동안에도 가족들, 아내와 아이, 그리고 친구들이 많이도 생각났다. 그 중에 가장 아련하게 떠올랐던 건, 그때 그 지하철역의 복도 벤치에 나란히 앉은 나와 그녀, 미주의 모습이었다. 아내와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말이다. 또 한 가지, 내게는 미주에게 확인하고 싶은 사실이 하나있었다.

 

또깍, 또깍, 또깍...

대림역 복도, 멈춰진 두 남녀에 다가가는 정장에 구두를 신은 노인의 걸음마다의 그 또깍소리가 그의 떨리는 마음을 대변했다. 이 순간은 노인에게 있어서 가장 아쉬운 한 장면이었다. 이곳은 지키지 못한 약속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녀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얻었던 기회였었다. 그 장면은 차마 볼 수는 없어서 노인은 시간 멈춤을 발동시켰다. 그리고 여자 옆에 가만히 앉았다. 노인은 오르골을 하나 꺼내 미주의 손에 살짝 놓았다. 노인은 다시 일어나 그들에게서 뒤돌아가려했다.

그 순간,

저기요, 할아버지!”

한 목소리가 노인을 불렀다.

분명, 내 살갗은 안 닿았었는데? 하필 지금 결함이 나타난 건가?

노인은 놀라 돌아봤다. 미주가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진 누구세요?”

, 저 그게...”

그녀의 물음에 노인은 입을 벌렸지만 차마 어떤 대답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더 이상은 미주도 노인의 정체와 지금 상황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단지, 좀 앉아서 얘기 좀 하자고 자리를 내 주었다.

할아버지는 참 낯설지 않아요. 이상하죠? 분명 처음 뵌 분인데...”

허허, , 그렇지? 나도 자네가 낯설지 않다네... 음 뭐랄까, 오래전 옛 친구를 만난 기분이야!”

노인에겐 맞는 말이었다.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을 이어갔다. 얼마간의 대화가 오고 간 후에 그녀는 물었다.

근데, 왜 저에게 이 오르골을 주고 가세요?”

미주가 오르골을 켜며 물었다.

이건, 것보다 내 얘기를 들어보게나. 난 원래, 옛 친구를 만나기로 했었어. 지금 그곳으로 가는 중이었지.”

미주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고, 노인은 그녀와 자신의 이름을 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이날 그녀를 데려다주었다.

고마워, 바래다 줘서. 잘가.”

신림역에 도착해 마을버스를 타기 전 미주는 내게 인사를 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도 못하고 그녀를 떠나보냈다. 그래서 더욱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대로는, 이걸로 끝이야...’

가슴이 무너졌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당장 전화해서 사랑한다고 나랑 사귀자고 할 수도, 그럴 용기조차도 없었다. 내게 주어진 현실은 멜로영화가 아니었기에...

밤기운은 무심하게도 내 몸을 점점 싸늘하게 만들었다. 얼어붙은 내 손으로 폴더 폰을 열어 메시지를 보내려했다. 언 손과 마찬가지로 머리도 얼었는지 적당한 말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지하철 막차를 타려면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내 몸은 매표소 앞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폴더 폰의 자판들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00:00

이런, 벌써?’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결국 내 폴더 폰도, 지하철을 타야하는 내 몸뚱이도 모두 때를 놓쳤다. 새벽 첫차를 타려면 아직 여섯 시간이나 남았다. 역 안쪽 복도 어느 벤치에서 쭈그려 밤을 보내려했다.

아저씨, 저기 가서 한잔만 더 합시다!”

반복되는 취객들의 대쉬를 피해 난 결국 근처 피시방을 찾아들어갔다. 그곳에서 메일을 보냈다. 피시방 가득한 담배연기 속에서도 난 밤새도록 그녀에게 보낼 고백편지 생각뿐이었다.

 

To. 미주

 

안녕 미주야, 나 민혁이야. 갑자기 이런 편지, 좀 놀랐지?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편지를 써서 보내.

혹시 당황스러워도 한번 읽어주길 바래.

... ...

 

더 이상 그 편지들의 세세한 문장이나 내용은 내 머릿속에서도 지워진지 오래다. 다만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고, 서로 여자친구, 남자친구라고 부르는 연인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였지 싶다.

한마디로 좋아하니까 사귀고 싶다는 내용이었겠지...

그 밤, 졸린 눈을 부여잡고 구구절절 긴 문장들을 간절한 마음으로 써내려간 기억만 어렴풋하게나마 남아있을 뿐이다. 며칠 후, 내 메일보관함에도 하나의 메일이 도착했다.

그녀였다.

민혁에게, 미주가. 라는 제목을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클릭했다.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리고 침을 꼴깍 크게 한번 삼키며 흔들리는 마우스 커서를 제목에 가져갔다. 띠딕 띠딕...

제목을 클릭하자 하늘색 바탕에 왠 까마귀가 종이비행기를 타고 나타나 내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To 민혁

 

안녕, 나 미주, 조금 놀랐어. 갑자기 이런 메일 받을 줄을 몰랐거든.

... ...넌 참 친절한 아이야... ... 편지 고마웠어... ...

 

그편지도 그다지 내 기억 속에서 남아있지 않다. 다만, 내가 친절하다느니, 내게 고맙다느니, 그런 포장들로 편지는 채워졌던 것으로만 기억된다. 여느 고백에 대한 거절편지가 거의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편지는 전반적으로 미주가 자신의 상황이 연애를 할 상황이 아니라서 계속 친구로 지내자는 내용이었다.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구나!’

메일을 읽고 난 나는 메일을 쓰기 전부터 들은 불안감이 현실로 펼쳐짐을 느꼈다. 떨리는 양손으로 얼굴을 부비며 머리를 한번 쎄게 쥐었다.

...

앞이 막막했다. 그냥 막막했다. 좀 더 그동안 적극적으로 하지 못한 자신이 새삼 더욱 한심스러웠다. 그렇게 한동안 아무것도 손에 안 잡혔다. 주위사람들이 내 걱정을 할 정도로 마음을 잡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시 그냥 친구로 지내면서 다시 기회를 봐도 되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때의 난 너무나 벽창호, 답답이가 되어 연락을 끊어버렸다. 어쨌든, 얼마 후의 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전에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메일 한통을 하나 더 보냈다. 1년 후에 혹시 가능하면 그곳, 대림역, 벤치에서 보자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메일을 읽었는지는 확인을 했으나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나로선 알 수가 없었다.

 

당장의 약속도 못하는데 1년 후의 약속이라니!

 

지금의 내 생각으로선 참으로 한심스러운 짓이었다. 어쨌든, 그때 메일을 보낸 나조차도 그 마지막메일을 까맣게 잊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최근에 부대를 이끌고 스피닝 페달을 밟던 도중, 그 생각이 갑자기 스쳐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덕분에 그 전장에서 전멸위기의 상황까지도 몰렸었다. 다행히 전부 무사귀환은 했지만 아찔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타인까지 끌어들여 죽음의 위기까지 겪고 보니, 그제야 결심이 섰다. 이제라도 그곳으로 가 그녀를 마주 볼 결심이 선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약속 시간의 대림역에선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당연했을 그 일방적인 통보성 약속이었다. 노인은 그것까지는 미주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이제와 갈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렇게 정리를 하며 이야기를 해보니 말이야! 고맙네 처자!”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혹시 괜찮다면, 그 오르골을 날 대신해 좀 간직해 주겠나? 이 노인네의 감사의 표시로 선물로 주고 싶은데 말이야!”

미주는 계속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고맙네.”

노인은 가벼운 고개인사를 하며 시간 멈춤을 풀었다. 노인은 제법 빠른 걸음으로 그 두 남녀 곁을 떠났다.

띠리리리리리리링

[, 내선순환 열차가 도착합니다. 타는 곳 안쪽으로 한걸음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

시끄러운 안내멘트가 흘렀고 곧이어, 열차가 들어왔다. 그렇게 미주와 젊은 민혁, 그 둘은 대림역을 떠났다.

 

장군님, 모시러 왔습니다!”

노인을 마중 나온 부대장이었다.

아우 깜짝이야. 뭘 그렇게 갑자기 등장하는가? 그래, 출발하지!”

노인의 모습은 정장에서 백발 노장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부대장과 출발할 준비를 했다.

장군님! 여행은 어떠셨나요?”

, 나름 정리되는 시간을 갖게 된 것 같아 좋았네그려! 자네가 준 것도 유용했고 말이야, 근데 하나 좀 결함이 있더군.”

? , 그렇군요!”

장군의 지적에 그냥 살짝 웃으며 넘기는 부대장이었다.

출발하지, 게이트를 열게!”

한 게이트가 열리고 둘은 그곳으로 들어가 대림역에서 사라졌다. 그 게이트도 곧 점차 크기가 줄면서 사라졌다. 게이트, 이곳을 통과하면 바로 전장이다.

장군님, 부대 준비가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뒤 따라오십쇼!”

부대장은 빠른 속도로 게이트를 통과했다. 부대장이 먼저 떠나고 장군도 마음을 다잡고 뒤따라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모두 준비들 되었겠지? , 출전한다! 우리에겐 승리의 영광이 있을 뿐이다!”

장군은 전보다 훨씬 활기차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부대장은 뭔가 흐뭇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명령을 하달했다.

옛 썰! 모두 장군님의 뒤를 따르라! 이번에도 승리를 쟁취하자!”

사기가 한껏 오른 부대는 흐르는 행진곡에 맞춰 기합을 질러가며 페달을 밟았다. 빛의 속도로, 아니 그것보다 빠르게 적진을 침투해갔다.

 

방금 전 게이트 안, 부대장이 앞서나기고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

민혁아.”

그 순간 자신을 부르는 그 말에 장군은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예상치 못한 때의 그녀 목소리였기에. 노인이 알던 때보단 뭔가 풍파를 겪은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고생 많았어, 거기서 곧 만나자.”

짧지만 노인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 한마디였다.

 

토벌완료, 토벌완료, 삼형제를 도와 적군 토벌완료! 사망자 1명 부상자 15! 장군님을 제외한 모든 부대원들 귀환을 보고합니다!”

눈물을 참아가며 부대장과 대원들은 가까스로 상부에 보고했다. 예상치 못한 큰 성과에 부대는 대중들의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보고가 끝나고 그들 모두 어느 절벽에 섰다.

장군님, 지금까지 고생하셨습니다. 휴가 잘 다녀오십시오!”

부대원들은 바닷물에 그의 뼛가루를 차례로 뿌렸고 경례를 올렸다.

장군님! 이건 마지막으로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부디 이분과 잘 만나십쇼!”

부대장은 오르골 하나를 이어서 던졌다. 그 오르골은 한없이 떨어지며 헤엄치듯 심해의 어딘가로 향했다.

 

고마워, 바래다 줘서. 잘 가.”

미주는 민혁에게 인사를 하고 마을버스를 탔다. 자리에 앉으니 버스 창에 비친 민혁이 보였다. 할 말이 가득한데 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는 애처로운 어린아이 같았다.

미안해...’

끝내 미주는 그 모습을 외면한 채, 그렇게 버스는 무심히 출발했다. 미주는 노인에게 받은 오르골을 열어보았다. 구슬픈 리듬가락이 흘러나왔다. 미주는 뭔지 모를 울음을 참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대림역에서 오르골을 받고 나서부터였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눈물짓게 했다. 마치, 속에서 뭔가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미주의 눈엔 참아왔던 감정이 그 순간 한줄기 눈물로 흘렀다. 미주는 조용히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 순간,

~!

미주는 어지러움을 느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전에 민혁이 자신의 주변을 맴돌던 모습들, 그것을 또 아까 그 노인이 지켜보던 모습들, 그리고 그 노인이 지켜본 자신의 불행한 미래의 모습들까지 눈앞에서 빨리 감기 되듯이 스쳐지나갔다.

, 술을 많이 마셨나?’

미주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걸 간신히 참았다. 집으로 가야된다는 생각만 잡고서 가까스로 돌아가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미주는 그날 밤 대림역에서 있었던 일과 그 영상들을 다음날 아침에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만다. 다만, 그 후부터 오르골을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소중하게 여길 뿐이었다.

민혁아~”

그녀가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민혁을 떠올리게 되었다. 예전 대림역도 떠올라 오르골을 보며 옅은 미소를 띄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친구 미진에게 마지막 문자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그 할아버지가, 아니 나이든 민혁이가 내게 오르골을 놓고 돌아섰을 때, 난 깨어났다. 그 시간의 멈춤 속에서...

내게 오르골을 준, 그리고 내 옆의 스무 살의 두 민혁은 멈춰있었다. 어느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 저분의 동료입니다. 혹시 저분, 누군지 알아보겠나요?”

그 남자는 대뜸 물었다. 그때까지 난, 노인이 누군지는 몰랐다. 그 말을 듣고 앞으로 가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 저기 저 앉아있는 민혁의 얼굴이었다.

, 어떻게 이렇게 닮았죠? 꼭 저 애의 미래를 보는 거 같아요!”

나는 놀라며 남자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 직접적으로는 말씀 못 드리는 처지라서. 단지 이렇게 상황을 보여드릴 뿐이에요!”

남자는 오르골을 대뜸 본인에게 달라했다. 방금 세워진 이론 상, 그 노인이 준 오르골을 갖게 되면 자신 속에 있는 오르골과 함께 둘 모두 파괴된다 했다. 그러면 둘 다 관련된 기억뿐만 아니라 존재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을 테니.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럼, 제 오르골을 꺼내가 보관해주세요! 제가 이것을 보관할게요!”

그러면, 당신은 서서히 저분과의 기억을 잃게 됩니다. 아무 기억 없이 그것을 보관하게 될 뿐이에요!”

남자는 걱정하듯 말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또다시 말했다.

괜찮아요! 기억은 어차피 흐려질 뿐이에요. 아련한 마음하나면 되요. 차라리 이런 오르골이 더...”

 

부대장이 던진 오르골이 심해에 다다랐을 때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어느 오르골이 곁으로 다가와 그것을 반겼다. 그 둘은 어느 순간 뒤엉켜 물보라를 일으켰고 어느새 주위로 하얀 알갱이들이 모여들었다. 점차 그것들은 미주와 민혁의 스무 살 적 모습으로 변했다. 둘은 서로 마주보며 손을 잡았고 곧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았다. 둘의 입술도 마치 하나인양 닿아서 한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리곤 이내 둘의 모습은 종적을 감췄다. 자리에 남은 건 곧 사라질 물보라 속, 방울들뿐이었다.

 

보명과 노인은 발사대 곁을 걸었다.

그렇게, 저기 있는 저 부대장 덕분에 고맙게도 나중에 그녀와 만날 수가 있었지.”

노인은 멀리에서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근데, 장군님이 오셨는데 왜 인사하러 안 나오죠? 그리 먼 거리도 아닐 텐데... 할아버지 말 듣곤 좋게 봤는데, 사람이 기본이 안 되었네?”

보명은 의아해하면서도 본인이 더 짜증을 냈다. 그 모습을 보며 노인은 껄껄껄 한참을 웃었다.

아차

노인은 그때 자신이 죽었다는 말을 먼저 했어야함을 인지했다. 그나저나 오해해서 저 멀리 부대장에게 괜한 성질부리는 보명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한순간이었지만 미주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다.

너무 그러지 말게나. 다 사정이 있는 것이야. 뭘 그리 열을 올리는 게야? 귀여워, 자네 참 귀여운 면이 있는 것이 그녀와 참 닮았네그려...”

노인은 가까스로 웃음 배를 놓을 수가 있게 되어 마저 이야기를 해주었다.

예쁘장한 것도 그녀를 참 닮았고 말이야! 자네! 어딜 가든 현실에 안주해선 아니 되네. 나와 그녀는 그러지 못했지만, 자네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네. 이것이 노인네가 젊은이에게 주는 마지막 메시지라네.”

노인은 오르골을 보명에게 주며 점점 흐려졌다.

이제, 가야할 시간이네! 젊은이여~ 미안하네만, 그것을 좀 그대가 보관해주겠나? 이건, 그녀와 나의 사랑의 결정체인데, 누군가 맡아주고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어. 자네가 그걸 좀, 맡아주시겠는가? , 가명을 써야한다면 미주란 이름도 함께 말이야. 어떠신가?”

보명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고맙네! 그리고 자네는 꼭! 사랑을 만나면 포기하지 말게! 주저하지 말고! 그것을 보면서 꼭 기억하시게...”

그녀는 노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노인이 거의 다 사라져 하늘로 올라갈 때쯤,

간직할게요! !”

보명은 오르골을 꼭 쥐며 말했다. 오르골은 그 손안에서 둥그런 구슬이 되었다. “. 그럴게요, !”

노인은 내려오는 햇살사이로 하늘의 어느 구름을 빌려 활짝 웃어보였다. 보명도 그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띄었다. 멀리서 여전히 부대장은 작업지시에 열중하고 있었다.

 

숨어 지내려면 가명도 써야했고, 목숨을 구해준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그 이름을 썼던 거야!”

보명은 구슬을 준상에게 내보였다.

이 구슬은 네가 좀 갖고 있을래? 도무지 내겐 쓸 방법이 없네.”

보명은 준상의 소환도구를 보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고마워 미주야!”

준상은 구슬을 건네받았다.

무엇보다 준상이 네가 꼭 그 이야기 주인공 남자아이 같았기 때문이야. 그런 사랑을 나도 받고 싶었나봐.

보명은 그 말은 아꼈다. 대신, 구슬을 소환도구에 대어보는 준상을 미소로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준상은 그 순간 크리스마스 아침, 엄마 앞에서 산타의 선물을 뜯어가며 기뻐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딱 맞아 미주야! 이런 식으로 구슬을 만들어 모으면 되겠어!”

이렇게 준상은 언제나 보명 곁에서는 한없이 바보 같고, 한없이 해맑은 아이가 되었다. 언젠가, 미주 곁에서의 민혁처럼 말이다.

!

너 왜 웃어? 왜 그래?”

준상이 웃는 보명을 보며 의아해 물었다. 보명은 그때의 청계천가 커피숍에서 자신이 미주가 된 순간을 떠올렸던 것이다. 말을 걸어준 준상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나온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는 소심하게 이렇게 말했었다.

저기요, 저 잠시만 저, 저기 그러니까 저, 아 어떡하지?”

? 왜요? 무슨 일이신데요?”

그렇게 마주친 그에게 퉁명스레 말했지만, 사실 난 그를 꽉 안아주고 싶은 걸 꾹 참았었다. 예전에 잠깐 얘기를 나눴던 젊은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곳이었구나.’

나는 노인을 만나 무사히 가려던 시대로 갈 수 있었다. 그 후 문득 궁금해졌다. 노인이 말한 발사대의 예전모습을, 아니 그것보단 노인과 그 옛 여인의 모습을 말이다.

[대림역]

새삼스레 세 글자가 나를 설레게 했다. 노인의 말대로 그 날짜에 가보니 말 그대로였다. 늦은 밤, 지하철 멀리에서 그 노인이 내려 멍하니 서 있고 얼마 후 계단으로 두 남녀가 걸어 올라왔다. 노인은 그들 곁에 잠깐 앉는가 싶더니 전철이 와서 그 둘은 전철에 올랐다. 나는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은 신림역에서 내렸고 그렇게 그 둘도 각각 흩어졌다. 계단 위로 올려다본 안절부절 못하는 남자의 뒷모습이 안쓰러워 혼났다. 남의 사랑이야기에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나조차도 의아할 정도였다. 아침 7시쯤 돼서야 남자는 집근처 전철역에 내렸다. 남자는 피곤한지 잠시 벤치에 앉았다. 난 그때까지 남자를 근처에서 관찰하듯 따라다녔었다.

, 이것 좀 따주실래요? 제가 힘이 없어서요. 부탁 좀 할게요.”

가까운 자판기에서 음료 캔을 뽑아 핑계 삼아 난 그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당황했지만 캔을 따주었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이거 드세요. 그리고 괜찮으시면 제 친구 얘기 하나 해드릴게요. 저도 방금 들은 얘기긴 하지만...”

남자는 어리둥절해보였지만 말해보라 했다. 그렇게 나는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 그리고 방금까지 보았던 것들을 친구이야기인양 그에게 늘어놓았다.

 

친구 분 상황이 저랑 비슷하네요. 잘해주세요. 많이 힘들 거니까...”

이야기를 다 들은 남자는 있지도 않은 내 친구에게 위로를 전했다.

그럴게요. 아 그런데, 비슷하다니요?”

나는 모른 척 물었다.

, 저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고 있어요. 남들이 답답하다고 할 만큼 미련하게 그냥...”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말끝을 흐렸다.

도대체 그런 걸 왜 해요? 힘들지 않아요? 그런 건 정말...”

듣던 중에 답답함이 몰려와 나도 모르게 따졌다.

그러게요.”

남자는 헛헛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초면인데 죄송해요.”

나는 바로 사과했지만 남자는 괜찮다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도 답답하거든요. 근데 뭐 사랑이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뭐든 주고 싶었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냥, 왠지 그 사람이 안쓰러워 보였어요. 맘 같아선 내 모든 걸 다 내주고 싶었지만, 전 해줄 수 있는 게 얼마 없더라고요. 그냥 그 사람 곁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챙겨주거나 바보짓으로 웃게 하는 게 다인 것 같아요. 미주가 웃는 모습 한번 보여주면 그걸로 좋아요.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모르죠? 저는, 저는 그걸로 됐어요. 그걸로...”

남자는 미주란 여자의 얼굴이 생각이 났는지 한번 씨익 미소 지었다. 그렇게 한참을 손에든 캔 커피를 보다가 갑자기 다급하게 말했다.

, 저 잠 좀 자고 알바 가야 돼서요. 이제 가볼게요. 그리고 캔 커피 잘 마실게요.”

시계를 본 남자는 꾸벅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다시 내려와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 그쪽, 친구 분한테 이 말을 좀, 전해주세요...”

내 마음을 울리는 한마디를 덧붙이고 또 저만치로 사라졌다.

아마 자기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으리라.

어쨌든, 난 아마 예전부터 저런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를 본 후 점점 그런 내 동경은 커져만 갔고, 드디어 그런 사람을, 그런 준상을 만난 것이다. 창가에 스며든 따스한 햇살에 기대어 잠든 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보명이었다.

그 사람과 함께한 자그마한 추억 하나 있다면 그 무엇과도 못 바꿀 소중한 걸 하나 가진 거라고. 혹시 그것이 보잘 것 없거나 찰나일지라도. 그러니 너무 절망할 필요 없다고요...”

 

13. 요괴들, 집합!

 

얼마 후, 따뜻한 창가햇살 데이트를 즐기던 미주와 준상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막내는 아직인가?”

곧 준서도 망토를 펄럭이며 등장했다.

유후~, 형님들! 무지개타고 내려왔나? 바람타고 날아왔나? 호호호호 쵸쵸쵸쵸무지개가 아닌 거북이 오줌줄기타고 내려온 홍길동 등장이요~!”

하늘에 거북선이 나타나 길동을 내려주었고 미주를 태우고 사라졌다.

다음에 거기서 또 봐!”

속삭인 미주는 준상의 입술에 살짝 입맞춤을 하고 서로의 눈을 맞춘 후 배에 몸을 실었다.

막내야~! 현무님한테 거 무슨 실례야? 무례한 언동은 좀 삼가줘라.”

아이참, 한번 타보세요 형님! 그런 말 안 나올 거란 말이죠! 준상형님, 이거, 영실대감이 드리랬어요!”

준상이 타박을 주어도 마냥 신난 막내 길동이었다. 덕분에 준상은 또 한숨을 쉬며 길동이 건넨 안경으로 바꿔 썼다. 그렇게 삼형제는 삼일동안 그 빌딩옥상에서 빌딩숲속을 활개치고 다니는 갑질러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준상은 쓰고 있는 안경테 다리 한쪽을 쉴 새 없이 두들겨댔다. 테를 두들길 때마다 안경의 렌즈부분에선 뭔가의 영상들이 흐르며 바뀌어갔다. 반면에 길동은 피크닉 나온 양 바람을 즐겼다. 큰 형 준서는 그저 말없이 아래에 펼쳐진 회색빛 빌딩숲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 , 겁나 많네. 예상은 했지만, 엄청나네, 엄청나! 빌어먹을 놈들! 돈 많은 게 벼슬이야? 젠장! 그 저승사자 아재의 다크써클이 이해가 가네, 그 오랜 시간 혼자서, 대단하셨네증말! 어휴, 안 그래요 형님?”

준상은 투덜거리면서도 안경 두드림을 계속했다. 반면, 준서는 계속 말이 없었고, 점점 표정만 일그러질 뿐이었다.

초희랑도 나중에 다시 와야겠구먼? 여기 너무 좋네!”

막내 길동은 여전히 감탄 삼매경이었다.

 

잠시 안경렌즈 속의 영상들을 살펴보자.

야 이 새꺄! 니깟놈이 누구 앞에서 지랄이야? 짤리고 싶어? 돈 벌고 싶지 않지?”

이 새끼가 돌았나? 내가 누군지 알아 새꺄?”

내가 여기서 쓴 돈이 얼만 줄이나 알아 이쒸펄놈아~ 이씨벌, 똑바로 안할래?”

변명하지 마 이 씨펄, 놈아, 그냥 쳐, 듣기나, 하고, 반성이나, ! , 병신아, ~!”

내가 이러라고 여기다가 돈 뿌리고 다니는 줄 알아? 이 벌레 같은 것들! 똑바로 안 해?”

 

영상 속, 일방적인 폭행들이 동반되는 이런 상스러운 말들의 타겟들은 모두 같은 모습이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불그스름한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를 했다. 멀끔한 제복이나 정장차림을 한 그들이지만, 그들 마음을 대변하듯 두 무릎들은 이미 닳고 닳아있었다. 마치 짠 듯이 그들 모두는 고개를 숙인 채,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쇠사슬들이 그들 목을 옥죄고 있기에...

그 쇠사슬은 등록금, 병원비, 집세, 대출금 등등, 여럿 이름으로 불린다. 어딘가에 있을 당신의 주변사람들, 혹은 당신에게서 말이다.

 

이틀이 지나고 눈부셨던 햇빛 대신에 달빛이 잔잔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 밤. 여전히 그 옥상엔 삼형제가 있었다.

으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요? 지친다. 지쳐~! 그 시간주문보다 더 짜증나는구먼!”

바람을 느끼며 감탄에 빠졌던 막내의 활기찬 모습은 온데 간 데 없었다.

구먼? 사투릴 어디서 배워왔어? 촌스럽긴!”

안경을 두드리던 준상이 안경을 벗으며 눈 끝을 잡았다.

아따, 형님, 이건 사투리가 아니지요~!”

아따 동상이 쓰는 게 사투리가 맞아요! 으이그...”

오랫동안 못해온 여느 형제들의 툴툴거림을 이제야 만끽하듯, 첫째를 제외한 두 동생들은 자주 툴툴대며 내심 즐거워했다.

꼬박 3, 길다 길어~!”

끝났는가? 수고했네, 준상아우!”

형님도 너무 사극 톤 좀, 이건 뭐~”

둘째는 쓰고 있던 안경을 길동에게 건네주고, 원래 본인의 안경으로 바꿔 썼다.

어쨌든 고생했네! 난 이만 내 할 일 하러 가겠네! 나중에 그 숲에서 보자고~!”

첫째는 말을 마치며 걸친 망토를 휘날리며 날아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 형님. 조심하세요! 그리고 형수님한테도 다녀오세요!”

첫째가 사라지기 전, 뒷모습을 보며 둘째는 소리쳤다.

막내, 너도 수고해주고!”

형님도요! 그때 봬요!”

둘도 사라졌다.

 

으으음, 으으음, 으으음,..

삼형제가 내려다 봤던 그 회색빛 빌딩숲에 작디작은 많은 진동들이 일제히 울려댔다. 그 진동들은 주로 돈 많고 예의 없는 것들이 주 고객으로 있는 서비스 상권에 나타났다. 여럿 회사건물에서도 종종 나타났고, 그밖에 술집, 병원 같은 곳에서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라면 예외가 없었다. 그 진동의 발원지는 어디일까? 어쨌든 갑질로 인해 멘탈이 붕괴되는, 소위 을이라 칭해지는 총알받이들의 스마트폰에선 차례차례 진동이 일었다. 도착한 메시지에 그들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곧이어 손가락들은 바빠졌다. 무대 위에서 격렬한 춤을 추는 한 쌍의 댄서커플마냥 양 손은 자판 위를 한동안 활보하였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2월의 어느 화요일아침, 광화문 일대의 도로는 평소완 다르게 한산한 모습이었다. 평일아침은 으레 출근차량행렬로 북새통이지만 지금은 설 연휴, 그중에서도 설날 아침이었다.

각깍각깍각깍...

귀한 손님이 오는 것을 알고서 저 까치들도 흥분을 하는 것인가?”

경복궁 근정전의 서쪽에 있는 경회루 위에서 용포를 입은 한 남자와 내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어깨를 숙인 채 서있다.

이도였다.

전보다 마르고 얼굴에 흰머리 밑으로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정 내관, 이제 그분들도 마무리 준비는 다 되었다 하더냐?”

, 전하! 광화문 앞에서 입학식이 성대하게 치러질 모양이옵니다.”

영실대감도 시간 맞춰서 도착할 테니 그리 알라 톡을 보내시게!”

, 전하!”

짧은 대화를 끝으로 용포의 남자는 경회루 한 기둥을 집고서 한동안 먼 곳을 응시했다.

세손, 조금만 기다리시게! 이 할아비가...

어느 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며 그들은 사라졌다.

 

쿠궁! 쿠궁! 쿠구구구구궁!

한적한 공기의 광화문광장 하늘에 요란하게 무언가 나타나 도로 위 하늘을 채워갔다. 그것은 기다란 나무기둥이었다. 그 나무기둥 위쪽에선 누군가들의 요란한 울음소리들이 들려왔다. 기둥의 두께는 장정 셋, 넷이 두 팔 벌려 안아도 힘들 것이었다. 그 기둥들은 광화문광장에서 시작되는 세종대로 하늘을 채워갔고, 이어서 한강대로로 이어져 노들섬 앞 하늘까지 그 행렬을 이어나갔다. 그로인해 도로 위를 달리던 차들은 분주해졌다. 행여나 기둥들이 떨어질까 서둘러 한강대교를 건너거나 샛길로 빠지느라 여념이 없었다. 곤충채집을 하는 아이의 손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곤충들이 이러할까? 당황한 나머지, 지들끼리 부딪히는가 하면, 엄한 건물에 지 혼자 꼬라박기도 여럿이었다. 평소의 그런 사고였다면 수화기너머 보험회사 상담원들과 전화데이트하기 바쁜 그들이었겠다. 그러나 그 순간엔 그조차도 안중에 없어보였다. 그 도로 어느 곳에서도 올려다볼 수 있는 공중 한 곳에서 숫자 10이 떠올랐다.

9, 8, 7...

점점 숫자는 0을 향해 달려갔다. 드디어 0에 다다르자 약속이나 한 듯 그 도로엔 사람과 차량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쿠오오오오!

한번 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 촘촘한 기둥들엔 진동이 일었다. 그 영향으로 도로까지 약간 흔들릴 지경이었다. 그 다음 순간 그 기둥들은 일제히 빠른 속도로 도로 중앙선을 중심으로 처박히며 먼지를 일으켰다. 마치 적의 폭격이라도 일어난 듯 했다. 그 순간 자이어드롭이라도 탄 듯 기둥 위쪽에선 또 한번 비명소리들이 시끄러웠다. 얼마 있지 않아 기둥들이 만들어낸 먼지폭풍은 사라지고 기둥행렬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부서진 도로완 다르게 기둥들은 아주 매끈한 것들이었다. 곧 사태파악을 위해 군용헬기와 언론사 헬기들과 차량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그러나 사진이나 영상만 찍을 줄만 알지 사태파악은커녕 주위만 배회할 뿐이었다. 지들끼리 통제랍시고 서로 몸싸움만 할 뿐이었다. 그 도로는 어떤 방어막에 휩싸였는지 다가가기도 불가능했다. 단지, 기둥위에 사람이 한명씩 매달려 울부짖는 모습만 확인할 뿐이었다.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소위 명품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 원생들 다들 모였는가?”

그렇게 한참을 울어재끼던 그들은 어떤 목소리에 울음을 뚝 그쳤다. 실로 울음 뚝! 하는 엄마의 소리에 울음을 뚝 그치고 입술만 실룩 떠는 어린아이들 같았다. 그 시선들은 하나같이 한곳을 향해 고정되었다. 그 시선들이 향한 곳은 저 멀리 있는 광화문 쪽 하늘이었다. 그곳엔 왠 성인 남자 셋이 하나같이 망토를 두르고 공중에 떠 있었다.

 

준서, 준상, 준성 삼형제였다. 그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포함해 황금빛 아우라가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들 주위로 몰려든 먹구름은 번개를 한번 지상으로 내려쳤다. 그때 삼형제 앞으로 스님복장의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애꾸눈을 하고 있었다.

다들, 오랜만이네 그려! 밝은 곳에서 이리 모이니, 아주 가관이구만 그래!”

걸쭉한 웃음소리와 함께 남자가 기둥들을 향해 말했다. 그 목소리는 어찌나 큰지, 공기를 타고 쩌렁쩌렁 울려댔다. 준서는 그 남자를 보며 동경의 눈빛을 보냈다.

그래, 이 교장님이 내준 입학숙제는 잘 하셨는가? 숙제 말이야! 잘 했을 것이야, ! 그렇고 말구!”

그의 말에 기둥의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눈치만 봤다.

이런 버러지 놈들! 뭘 그리 쭈뼛대는 것인가? 어서 대답하라. 숙제들 했는가? 안했는가 말이야?”

남자는 소리쳤고, 그 무리들은 벌벌 떨며 울어댈 뿐이었다.

그때 분명히 짐이 친히 너희들에게 말해주었다! 숙제를 해오면 너희들에게 갱생의 기회를 줄 것이라고, 버러지 같은 너희들에게 분에 넘치는 기회를 주겠다고 말이야! 그런데...”

남자의 말은 공기를 타고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남자는 칼집에서 검을 빼들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니들 버러지들은 마구니를 씻어내지 않는 것인가? 이 미련한 것들아! 결국 미륵인 짐이 친히 관심법을 써야 속이 후련하시겠는가? 안되겠구나! 너희들의 그 머릿속의 마구니들을 미륵인 짐이 싹 다 베어주겠노라! 너희들 대갈통에 낀 그 마구니들 말이야!”

남자는 허리에 찬 검을 빼내 휘두르며 기둥 위 버러지들 쪽으로 날아갔다. 주위는 눈을 못 뜰 정도로 눈부심으로 가득 차올랐다.

 

얼마 전, 서울에 위치한 어느 백화점의 명품매장 안.

야 이 새끼야! 네깟 놈이 누구 앞에서 지랄이야? 짤리고 싶어? 돈 벌고 싶지 않지? 이 새끼가 돌았나? 내가 누군지 알아 새꺄? 내가 여기서 쓴 돈이 얼만 줄이나 알아? 똑바로 안할래? 내가 너 이러라고 여기다가 돈 뿌리고 다니는 줄 알아? 이 벌레 같은 것들!”

고블린보다 짜리몽땅하고 성질 드러운 남녀 쌍으로 묶인 갑질 요괴가 한창 먹잇감들을 사냥 중이었다. 그 귀하고 비싼 밍크갑옷을 갑빠에 장착하고 명품백과 지갑을 창 삼아, 방패삼았다. 요괴 주위의 정장차림의 먹잇감들은 약속인 냥 하나같이 무릎 꿇고 고개 숙여 사냥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단 한사람, 살짝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똥 씹고 있는 한명은 예외였다. 준서였다.

어이~ 그만해 병신요괴 같은 것아! 간만에 백화점 쇼핑 좀 하려고 했더니, 여기가 너네 사냥터니? 놀이터야? 못생긴 요괴 놈 년들이 생긴 대로 놀아요! 그렇게 생기면 다 그래? 으이그... 다들 한결 같구만 저런 놈들은! 그 학원 어딘지, 내가 찾아내기만 해봐 아주! 이 두 명도 추가시켜야겠어! 캐도 캐도 끝이 없어 이 종자들은 증말!”

혀를 차는 준서의 말에 요괴 한 쌍은 이빨을 드러냈다.

뭐 인마? 너 뭐라 그랬어? 얌마! ! 사람 외모비하 했어! 딱 걸렸어, 너 신고 할 거야. 딱 기다려! 우리가 누군지 알아 인마?”

뭐 인뫄? 눠 뭐롸 구뤴오?”

준서는 요괴의 말을 오바스러운 동작과 함께 비꼬며 따라했다.

으이그, 지랄났다. 외모비하는 사람한테 했을 때 해당 하는 거고, 너네 요괴들한텐 해도 되거든. 요 못생긴 갑질 요괴들아! 요괴들이면 어디 조용히 동굴에나 박혀있지 왜 인간세계에 기어 나왔뉘? 그 개털들은 어디서 잡아 맨 거야? 니들도 요괴랍시고 사냥 좀 하는 거니?”

준서의 말에 남자요괴는 열 받았는지 밍크갑옷을 벗어던지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자꾸 누구보고 요괴요괴 지껄여? 이 새끼가 돌았나! 너 일로와!”

요괴의 몸은 근육질몸매에 다부진 어깨를 자랑했다. 그 근육요괴는 자신이 배운 유도기술로 남자를 쓰러트릴 생각에 흥분하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준서가 누구인가? 그는 살짝 사라졌다가 나타났고 요괴는 고꾸라졌다.

그럼, 요괴한테 요괴요괴 하지, 뭐 다른 말이 필요해? 다들 일봐요. 일어나세요!”

준서의 말에 무릎 꿇던 다른 직원들은 흩어졌다.

이것들이 어딜 가? 꿇어! 꿇으란 소리 못 들었어?”

얼굴이 빨개진 여자요괴가 고래고래 소리쳐봤지만 더 이상 소용없었다.

조용히 좀 가자! 이놈들은 조용히 가는 법이 없네! 그것도 학원에서 가르쳤어? 사교육으로 뭘 가르치는 거야?”

준서는 재빠르게 그 요괴 둘의 목을 비틀어 기절시켜 어디론가 사라졌다.

 

얼마 후, 어두컴컴한 방안, 갑질을 부리던 남자가 깨어나 보니 그곳은 어느 실내였다. 온통 깜깜해 마누라는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고, 자신의 몸은 뭔가에 끼여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목도 천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고정되어 있었다.

야 이 새꺄! 이거 풀지 못해? 여기가 어디야? 여보 어딨어? 이것들이 날 어디로 데려온 거야? 내가 누군지 알아 인마?”

방은 콜록대는 기침소리와 비명, 울부짖음, 그리고 비슷한 멘트의 자기과시로 소란스러웠다. 그곳은 옆으로 한없이 길쭉하지만 그 폭은 몸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좁디좁은 얇은 방이었다. 전등하나 없는 그 방에 서로 닿지 않는 간격에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묶여 꼼짝을 못했다. 그들이 내는 소음만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수단이었다. 어두워 그런지, 그들 누구하나 그 수가 얼마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소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만 느껴질 뿐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기세등등하던 그 남자도 울먹이며 잘못했다고 빌 뿐이었다.

뭘 잘못한 건지는 알긴 아는 거야 뭐야?

 

14. 환영한다. 요괴갱생학교 입학식에 온 것을...

 

으하하하.

어느 순간, 걸걸한 웃음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이건 뭐 요괴합창단인가? 그래, 요괴들이 단체로 합창을 해대는 것이 한곡의 갑질 요괴 합창곡이로구만.”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걸걸하게 웃어댔다. 그들은 둥지에서 어린 새 마냥 자신의 먹이차례를 기다리듯 울어댔다.

그만 그쳐라 이 버러지들아!”

목소리의 한마디에 합창단원들은 한순간 뚝 그쳤다. 목소리는 말을 이었다.

너희처럼 질 안 좋은 놈들은 갱생을 좀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갱생학교라는 것을 세웠지, 너희들을 위해서 친히 말이야! 난 그곳의 교장이라는 걸 맡게 될 것이고, 너희들은 학생이 될 것이야.”

목소리는 입학조건은 따로 없지만 숙제가 하나 있다고 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벌려온 그들의 만행을 잘 정리를 해 적어오는 것이었다.

종이에 적든, 스마트폰에 적든 어디든 상관은 없다! 입학식은 불시에 시작을 할 것이니 서둘러 적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불이행시 즐거운 경험을 겪게 될 것이야! 아주 좋아 날뛰게 될 것이다! 그럼 이만, 오늘 임시소집은 이쯤에서 마친다!”

방안 어디선가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그 소집원들은 각자 일상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렇게 다시 소환된 기둥 위 소집원들은 하나같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바짝 수그렸다.

아 놔 이놈들 쫄기는! 니들 그렇게 잘 쪼는 애들이었니? 당당 좀 해봐 평소처럼! 우린 숙제하나 안 해왔다고 해코지하는 그런 극악무도한 애들이 아니에요! 입학생들아 잘 들어라! 난 두통 때문에 두 번 얘기 안한다. 입학식의 진행절차를 설명하겠다.”

수그렸던 입학생들은 눈을 떠 주위를 확인해보니 그곳은 광화문광장 앞이 아니었다. 주위가 바다로 둘러싸인 작은 무인도였다. 섬 중간에 층층이 쌓인 바위층 위로 과자를 쩝쩝 씹어대며 입학식의 진행절차를 말하는 이가 있었다. 그의 한 손엔 과자봉지가 들려있었다.

, 저 산만한 놈들 때문에 내가 맘 놓고 과자 먹을 시간이 없어요!”

커다란 기둥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입학생들 몸은 단단한 나무 기둥에 묶여있었다. 그리고 인원도 반의반 정도로 확 줄어있었다.

어쨌든 너희들의 갱생학교 입학을 축하한다! 난 저승사자 겸 지금은 너희들의 갱생프로젝트 입학 섬 담임을 맡게 되었다. 사실 다른 반도 입학초기엔 전부 내가 맡게 되었지만. 하여간에 이놈이나 저놈이나 귀찮은 일들은 꼭 나한테 죄다 넘긴다니까! 얼른 입학식 끝내고 발해십자매클럽님들한테 넘겨야지. 아 배고파, 머리도 아프고!”

담임은 한숨을 한번 쉬며 과자를 계속해서 깨물어댔다.

어쨌든 앞으로, 지금까지의 정신 나갔던 요괴 짓을 반성하고 보통의 선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해주길 바란다! 보아하니 니들 특기를 살려 각각의 섬들로 나눠 모아 놓은 듯하구나.”

저승사자는 서류같이 생긴 것을 넘겨가며 출석 부르듯이 말했다.

보자 뭐가 있나, 얌체요괴 반, 갑질요괴 반, 진상요괴 반, 농땡요괴 반, 양아치요괴 반, 뺀질요괴 반, 또라이요괴 반, 개차반요괴 반, 무뇌충요괴 반, 그냥병신요괴 반, 뭐가 이렇게 많아? 니들은 멀 그리 악한 짓을 다채롭게 한 것이야? 선한 짓은 그리도 가뭄에 콩 나듯이 하면서 말이야. 근데 뭐 이런 것들이 중요하겠는가? 다 같은 정신 나간 것들인 것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승사자는 들고 있던 서류더미를 집어던졌다. , 땅속에서 뭔가 젤리 같은 것들이 계속해서 툭툭 튀어 올라 꿈틀댔다.

시간이 됐군. 자 제군들, 전에 숙제 안 해오면 즐거운 경험이 기다릴 거라 들었겠지? 지금부터 괴수들과 어울려 입학식을 거행한다. 1회 입학식이다. 다들 마음껏 즐겨주시게나~! 오랜 전통이 될 입학식의 포문을 열어주시게!”

그들을 포박하던 나무 기둥은 사라졌다. 그러자 꿈틀대는 젤리는 길쭉길쭉 이빨을 드러내며 신입생들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악~!

엄마!

신입생들은 엄마를 애타게 부르짖으며 뛰고 또 뛰었다. 그들의 살점을 뜯으려 덤벼드는 젤리들도 그 뒤를 바짝 쫒았다.

달려라 달려! 역시, 입학식은 괴수와 함께 이리저리 달리기가 제격이군! 다들 감동하여 부모님 생각이 절로 나는걸 보니! 준서 그자가 재밌는 곳을 만들었어! 덕분에 우리야 편하지... 기회를 한 번 더 주길 잘했군 그래!”

자리에서 과자를 까먹으며 느긋하게 관전하는 저승사자였다. 이런 입학식이 열개 섬에서 동시에 성대하게 치러졌다.

제대로 팍팍 못 달리겠느냐? 이놈들아! 그래가지고 너희들 속 마구니를 쫒아낼 수 있겠는가? 좋다! 좋아! 그렇게 달리는 거다. 좀 더 빨리!”

가까운 하늘에 그 애꾸눈 스님이 나타나 호통을 쳐댔다. 교장이었다. 여전히 학생들은 입학식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 스님, 카리스마가 넘쳐흐르시네, 아주!”

당연하지, 저래보여도 한때나마 태봉국의 군주였으니까! 그것도 아주 지독한 독재자!”

길동이 감탄을 했고, 옆의 준서는 사극마니아답게 설명해갔다. 준상은 섬들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그는 허리에 찬 스키아를 꺼내들어 섬들을 살피다가 한 섬에서 멈췄다.

역시나, 저것들도 왔군!

그는 한 지점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곳엔 멀대같이 삐쩍 골아 침을 질질 흘리며 서로의 두발이 묶여 뒤뚱뒤뚱 뛰어다니는 두 남녀가 보였다. 준상이 얼마 전까지 직장으로 다녔던 병원의 원장과 수간호사였다. 쥐꼬리만 한 동네안과의 원장, 수간호사! 그들의 같잖은 계급놀이는 정말 가관이었다. 어쨌든 지금 그들은 서로를 밀쳐내곤 있지만 발이 묶여 어쩔 수 없이 붙어 다녀야만했다. 그 두 입엔 서로에게 향한 욕설들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드러운 침에 실려 서로를 오갔다.

염병할 놈들!

역시나 다들 불려오셨군!

저들을 안 부르면 섭섭하지. 저런 가식적인 암 유발자들!

준상은 갑질 남녀들을 보며 한번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저놈들에게 얼마나 지지고 볶였어 내가! 염병할 놈들!

준상의 머릿속 세세한 기억들은 지워졌지만 그들을 보고 치가 떨리는 건 그때의 감정 그대로였다.

아직 시작도 안했다. 이놈들! 빨리 뛰지 못할까? 어서!”

교장은 채찍 같은 말로 입학생들을 달달 볶았다.

 

, 이제 당분간 이곳은 저분들께 맡기고 다시 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러 가야지?”

준서가 준상과 길동에게 말했다.

예 형님, 이제 저분들에게 맡기고 우리도 힘을 내야겠죠!”

그럼 이제, 달에 가는 거죠? 신난다! 달 소풍이로구나! 초희도 데려올 걸! 형수님, 서진이, 그리고 보명공주님도 다함께 말이에요!”

길동은 두 형들 말에 흥분하며 말을 거들었다.

막내야!”

두 형들은 막내를 말려가며 약간의 한숨 섞인 미소를 지었고, 그렇게 셋은 사라졌다.

 

세찬 바람이 불어대는 고층빌딩의 옥상, 지난번 갑질 요괴들을 물색하던 그곳에 그들이 다시 나타났다.

어우 추워! 이거 너무 추운데요?”

길동은 온몸을 부여잡으며 벌벌 떨었다.

대감님도 참, 이왕 데리러 올 거면 따뜻한 곳으로 오시지, 여긴 너무 춥잖아!”

나머지 두 형제도 벌벌 떨었다.

이것 참, 곧 바람 불고 번개까지 칠 텐데. 이것도 못할 짓이네! 어우 추워...”

준상도 떨며 한마디 거들었다.

콰광쾅쾅!

얼마 후 여느 때처럼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한번 그어지는 번개가 거북선을 데려왔다. 거북선은 그들을 태우고 하늘 위로 솟구쳤다.

 

거북선은 지상과 가까운 하늘, 대기권을 훌쩍 벗어나 달 근처까지 비행했다.

이제, 더 이상은 데려다 줄 수 없겠구나!”

삼형제에게 현무는 말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감사드리죠!”

준상은 감사의 표시를 했고 셋은 거북선 밖으로 사라졌다.

길동아! 무슨 일이 있었어도, 또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가족이 함께 하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아야한다!”

사라지기 전 막내, 길동에게 영실대감은 다소 뜬금없는 조언 같은 인사말을 전해주었다.

갑자기 낯간지럽게 왜 그러실까? 어쨌건 대감님, 전부터 계속 신경써주셔서 감사드려요. 다녀올게요!”

길동은 대감의 정확한 말뜻은 헤아리진 못했지만 뭔가 진심이 느껴져 대답하며 두 형들을 따라갔다.

부디 동요되지 말거라! 길동아! 넌 강한아이야!”

사라진 그 자리를 보며 영실대감은 잠시 한마디 중얼거렸다. 거북선은 그들을 달 표면에 내려주고 다시금 사라졌다. 셋은 커다란 구멍이 나있는 달 표면에 섰다. 지구에선 아직 관측이 안 된 달의 뒤편과 가까운 곳이었다.

여기가 아버지가 있는 곳의 입구일까요?”

준상이 물었고 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들어가시죠. 형님들!”

길동의 한마디와 함께 셋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그 긴 암흑의 구멍을 한참을 통과해 들어갔다. 준상은 메고 있는 가방 안 고주망태 영감이 건네준 황금도장을 떠올렸다.

 

영감은 그 숲의 동굴에서 내가 가져나온 그 커다랗고 무거운 쟁반 같던 황금동전으로 만든 것이라 했다. 지금 도착할 그곳으로 가서 그 도장으로 보고 싶은 영상, 인류의, 지구의 전 생물들의 영상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 들었다. 저승사자가 가진 인생영상을 보는 능력과 같은 종류의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후에 바로 진실과 마주하게 될 거란 말과 함께 영감은 도장하나를 내게 주었다.

도대체 그 진실이라는 건 뭘까? 우리 형제가 알아야 하는 게 또 남은 것인가?

 

15. 고주망태와 미호, 그리고 삼형제

 

광화문에서 그 기둥들이 나타나기 전, 삼형제는 그 옥상에서 갑질 요괴들을 물색한 후 흩어졌다가 얼마 후 어느 숲에서 다시 모였다. 그곳은 바로 고주망태와 미호가 사는 도깨비 숲이었다. 길동은 그 후에 곧장 이 숲으로 와서 고주망태와 함께 수련을 계속하며 두 형님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 형님들, 다녀오셨어요! 어서들 오세요!”

돌아오는 형님들을 향해 팔을 흔들며 길동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덕분에 준상과 준서는 마치 외출했다가 가족들이 반기는 집으로 돌아온 듯 따뜻한 기분을 오랜만에 느꼈다.

어서들 오렴! 준상이 오랜만이야, 구슬을 참 많이 모았구나! 그리고 네가 첫째 준서구나? 잘 왔어. 다들 배고프지? 어서 들어가서 저녁 먹자꾸나!”

미호도 옆에서 준상과 준서를 반겨주었다.

그래 장남까지, 그 아이들의 자식들이 다들 이렇게 모였구나! 날이 춥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고주망태도 거들며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갔다.

미호 아주머니, 오늘도 달래 된장찌개 있어요?”

아 그럼, 물론 네가 좋아하는 걸로 준비했지. 충분이 있으니 기대해! 어서 들어가자꾸나!”

준상은 그때 끝일 것만 같았던 그 식탁을 다시 보게 될 생각을 하니 그저 좋았다. 그리고 준상의 그 물음에 흐뭇해진 미호는 아홉 꼬리를 팔랑팔랑 흔들어댔다.

길동이도 그렇고, 니들 짝들은 왜 안 데려왔니?”

, 그러게요...”

미호의 물음에 다들 머쓱해했다.

그래, 다음엔 꼭 데려오렴, 맛있는 건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같이 먹어야 더 맛있는 거야!”

.”

그렇게 몇 마디 나누니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식탁에 도착했고 다들 자리에 앉았다.

근데 영감님, 웬일로 장난을 안치신데요? 이쯤이면 몇 번 하셨어야...”

준상이 물었다.

욘석아! 내가 언제 시도 때도 없이 그러더냐? 밥이나 먹어라!”

고주망태 영감은 대답하며 미호 눈치를 봤다.

기다려라 이것아! 곧 예고 없이 시작될 것이야! 아주 삼형제, 세트로 볼만 하겠군! 으하하하!

식사 직전에 장난치면 아내 미호가 불같이 화를 낼게 뻔해 어쩔 수 없이 지금은 참는 영감이었다. 영감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자, 미호는 눈치 챘는지 영감을 한 대 치며 말했다.

여보 뭐해요? , 다들 어서 들어요. 많이 들어요! 또 먼 길을 가야할 테니...”

그렇게 그들의 식사는 시작되었다.

 

한참 후, 준상과 길동은 배를 부여잡고 의자에 기대어 연신 한마디만 외쳤다.

, 더는 못 먹겠다. 배불러!”

그러나 미호는 전처럼 그들에게 더 먹으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아니 신경도 쓰지 않았다. 미호는 오직 한사람만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바로 준서였다.

, 어쩜 이리도 잘 먹을까?”

준서의 옆엔 접시들이 쌓여갔고 한계를 모르는 듯 계속해서 음식을 흡입하고 있었다.

우리도 많이 먹었는데...

동생들은 미호의 부담스러운 관심을 안 받아 안심했지만 내심 서운하기도 했다.

허허허허, 자네, 참 잘 먹는군! 저기 저 동생들은 비교가 안 되는 거였어!”

고주망태 영감도 웃어댔다.

그러게요, 동생들 좀 더 먹어! 먹고 힘내야지!”

준서는 멈출 줄 몰랐다.

많이 먹게. 그나저나 준상아...”

고주망태 영감은 준상에게 화제를 돌렸다.

 

고새 구슬을 많이 모았나보구나? 어떤 종류인지 말해주렴!”

아직, 몇 개 못 모았어요. 이제 시작인 걸요!”

준상은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구슬들 여러 개를 집어 꺼냈다.

사극을 좋아하시는 큰형님한테 영감을 얻었어요. 영실대감이 만든 시간이동장치로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고 왔거든요. 그들의 고유한 힘을 담아 구슬을 만들었어요. 역사를 만들어 오신 분들이기에 힘은 예상대로 엄청났어요! 아직 극히 일부의 분들만 만났지만, 저희의 첫 번째 계획을 실행하기엔 차고 넘치죠. 물론 저승사자님도 도와주시기로 해서 충분해요.”

준상은 갑질하던 놈들을 잡아 갱생학교를 만들고 있는 이야기를 늘어놨다.

지금은 임시소집까지 끝마친 상태에요.”

임시소집이라. 것 참, 재밌네, 재밌어! 예전엔 그 놈들이 엄한 놈들을 잡아다가 학교랍시고 갖고 놀더니, 이번엔 역으로 그들이 당하고 있군. 혹시 그 일을 역발상 한 것이냐?”

아니요. 몰랐어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준상은 놀라며 물었다.

, , 뭐였더라?”

삼청이요, 삼청 교육대.”

영감이 버벅대자 준서는 한마디 거들고 다시 흡입모드로 돌아갔다.

미호는 여전히 사랑스럽게 준서를 바라봤다.

어쨌든, 앞으로는 역사인물 뿐만 아니라 우리 도깨비 같은 신들의 영역의 힘도 모아보시게나. 그런 의미에서 자!”

고주망태는 구슬 하나를 준상에게 건넸다.

, 이건...”

이어, 미호도 구슬하나를 건넸다.

이건 우리의 힘이 담긴 구슬들이란다. 언제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면 이걸 사용하시게! 이걸 들고 명상을 하면 신들의 영역으로도 갈 수 있을 거야. 명상은 잘 알고 있겠지?”

그럼요, 당연하죠. 감사합니다!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준상은 일어나 90도로 인사하며 감사를 표했다.

원 녀석, 이 할아비한텐 그리 인사안해도...”

영감은 민망함을 감추려 괜히 툴툴댔다.

어쨌든, 우리 도깨비들이나 구미호들 말고도 여럿 신들도 찾아가보시게나!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게나. 지난번 네가 꺼내온 커다란 동전 기억하지? 이번을 대비해 내가 미리 도장의 형태로 바꿔놨다네. 달에 가면 이것이 필요할 것이야. 가져가렴!”

고주망태가 준상에게 황금도장을 건네며 용도를 설명해주었다.

, 형님, 손오공 일행도 찾아가보세요! 그 경복궁 지붕에, 아니다. 나중에 저랑 한번 가요!”

길동은 갑자기 생각났는지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그러자! 근데 형님은 캐나다에 잘 다녀오셨어요?”

 

준상은 준서의 집에서 본 편지가 생각났다. 그것은 캐나다에서 보낸 형수, 준서의 아내로부터의 편지였었다. 분명 이곳으로 오기 전, 캐나다를 다녀왔으리라.

, 맞다, 이것 좀 봐봐! 우리 서진이야! 너네 조카야! 어르신들도 보세요!”

준서는 먹는 걸 멈추고 스마트폰을 꺼내 아들바보모드가 발동한 수다쟁이 버스기사로 돌아왔다. 아들자랑을 늘여놓은 그의 스마트폰엔 캐나다에서 찍은 사진들이 가득했다. 사진 대부분은 다섯 살 배기 아들, 서진의 것들이었다.

어쨌든 잘 풀리셔서 다행이에요!”

준상은 내심 안심하며 그 마음을 전했다. 두 동생들은 물론이고 고주망태와 미호도 서진의 사진을 돌려보며 귀엽다고 연신 감탄했다. 특히나 미호가 제일 적극적이었다.

어머머머, 네 아들이야? 서진이? 어머~! 통통한 것 좀 봐. 잘 먹게 생겼다. 잘생겼네! 뭐 잘 먹니? 언제 함 데려와! 서진이 좋아하는 것 다 해 놓을 테니까! 어머~ 이것 봐, 너무 귀엽게 생겼다! 우리 서진이!”

것 참, 언제 봤다고 우리 서진이야?”

당신은 좀 가만히 있어요! 묵밖에 안 먹는 편식 쟁이 주제에! 하여튼 우리집안 도깨비들은 묵만 먹어 어떻게 된 게!”

도깨비들은 원래 다 그렇거든?”

원래는 무슨, 당신! 오늘 참, 맘에 안 드네요?”

괜한 투정을 부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고주망태영감은 미호의 매서운 눈빛에 움츠렸다. 미호가 정말 제대로 화내면 폭주한 고주망태와 홍길동이 같이 덤벼도 별 거 아니게 훨씬 강해진다. 그것을 알기에 고주망태는 더 이상 선을 넘지 않았다.

어머! 정말 이번일 마무리되면 다 같이 오렴! 이 아줌마가 또 실력발휘 좀 할게! 니들 여자 친구들도!”

, 그럴게요!”

쪼는 영감의 모습에 덩달아 쫀 삼형제는 대답했다.

영감님 여기서 더 나가면 위험하세요.”

예전 구미호에게 영감과 같이 제압된 적 있는 길동은 영감에게 속삭였고, 영감은 그때 생각에 진땀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호는 계속...

아웅, 귀여운 우리 서진잉! 저 영감만 아녔으면 이 할매가 당장 쫒아 가볼 텐데...”

영감은 아무 말 못하며 헛기침만 해댔다. 삼형제는 그들의 눈치를 보며 그렇게 화기애애한 식사는 마무리되었다.

 

16. 재회

 

늦은 밤, 부엉부엉 부엉이가 울기 시작할 무렵, 배부른 삼형제는 오랜만의 깊은 잠에 한창 빠져있었다.

으아아악!

그러다 약속한 것처럼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다들 같은 꿈을 꿨나?”

둘째 준상이 신기한 듯 물었다.

혹시, 달에 가는 꿈?”

길동이 되물었고, 삼형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서로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뭔 꿈인지는 잘 생각은 안 나는데, 달은 맞는 거 같고, 어쨌든 무척이나 음산했어. 뭐라 그래야할까? 뭔가... 오랜만에 느껴보는 공포였어...”

식은땀을 흘리던 준상을 비롯한 나머지 형제들도 파르르 몸을 떨었다.

같은 꿈을 동시에 꾸다니. 이건 도대체...”

준서도 꿈을 의아해 할 무렵, 방문이 열리며 고주망태가 들어왔다.

때가 된 듯 하구나! 어서 출발할 준비를 해라! 너희의 집으로 보내줄 것이다!”

영감의 말에 삼형제는 잠이 덜 깨거나 말거나 주섬주섬 옷가지들과 짐들을 챙겨 영감을 따라 나섰다. 전에 준상이 영감 뒤를 따라 걷던 그 숲길이었다.

영감님! 왜 이렇게 또 빨리 가세요. 또 장난치시려고 그래요?”

이번에도 멀찌감치 떨어져 앞서 걷는 영감을 보며 준상은 물었다. 그러나 영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치 준상이 훈련했던 그때처럼...

형님, 그리고 길동아. 저 영감님 장난치는 시간이 됐나봐! 긴장들 하세요!”

영감의 모습은 또다시 보이지 않게 되었고, 영감의 횃불색도 붉음에서 시퍼런 색으로 바뀌었다. 준상은 한숨을 쉬었지만, 삼형제는 별 수 없이 그 불빛만 따라 숲길을 걸어갔다.

? 근데 이 길이 이렇게나 길었나?

준상은 의아해했다. 분명 그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한참을 가도 그때의 공터와 집이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길인가? 그 집 말고 딴 곳으로 가는 건가? 것 참, 이상하네. 내가 잠이 덜 깼나? 준상은 계속 갸우뚱했지만 별수 없이 모두와 걸을 뿐이었다. 혹시 이번에도 영감의 장난으로 이들을 오랫동안 숲을 걷게 하는 것인가? 장난치곤 재미없는데? 놀래 키지도 않고, 고새 장난스타일이 바뀌었나? 어쨌든, 계속 따라가 보자.

 

시퍼런 불빛을 따라 한참을 걸은 삼형제는 드디어 한 집 앞에 도착했다.

드디어 도착했나보네요!”

, 그런데 여기는?”

우리 집이다! 형님들 여긴 우리 집이에요! 우리 집이 왜 여기있지?”

그렇다. 삼형제를 반긴 그곳은 그들이 부모님과 살았던, 화목했던 시절 그 숲속의 집이었다.

우리가 살았던 곳이 도깨비 숲이었나?”

아니, 그땐 아니었지!”

준상의 물음에 영감은 모습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너희들, 아니 정확히는 너희 어머니, 내 손녀딸을 찾기 위해 도깨비 숲의 범위를 점점 더 늘려 이곳까지 확장하게 된 게야!”

, 손녀딸이요? 그럼 할아버지가 진짜 우리 증조할아버지?”

그럼 전에 봤던 집들은 뭐죠? 두 집 다 비슷했는데요.”

놀란 길동과 준상이 차례로 물었다.

만일의 일을 대비하여 이집은 숨겨놓고, 가짜들을 곳곳에 또 만들어놓았거든.” “만일의 일? 그게 뭐죠?”

그걸 다 말하기엔 지금은 시간이 부족하단다. 나중에 전부 다 설명해 줄 테니 지금은 너희들 모두 저 집으로 들어가거라. 들어가 보면 알게 될 것이야.”

과거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 것이란 짧은 설명으로 영감은 삼형제는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혜리야, 너희 자식들이니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야! 아이들을 믿는다. 이 할아비는...”

삼형제의 뒷모습을 영감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보, 이제 그만요! 제발! 저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래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

이거 놔! 저거만 없애면 되... 저거 하나만...”

준서, 준상아, 어서 막내 데리고 도망가! 어서...”

 

집으로 들어온 삼형제 앞으로 흐릿해진 기억이 머리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장면 장면들이 펼쳐졌다. 웃음이 가득했던 행복한 기억, 따스함이 그들을 감싸고 있던 기억들이 입체 홀로그램처럼 차례차례 그들 앞에서 흘렀다. 멍하니 삼형제는 누구하나 말을 잇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그 행복한 기억들의 장면은 매우 빠르게 흘렀지만, 이곳에서의 마지막 장면들은 느릿느릿하게 천천히 흘렀다.

왜 이렇게, 이 장면만 느리게 가는 거야!”

막내의 한마디 말고는 형제들은 아직 고요히 멈춰있었다.

계속 뛰어! 멈추지 말고, 얘들아...”

도망친 어린 삼형제들과 그들을 쫒아간 아버지가 사라지고 남겨진 가녀린 한 여인이 집 앞 마당에서 구슬프게 울었다.

어머니

엄마

엄마

삼형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엄마를 부르며 울어댔다.

그때였다.

우릴 구해주지 않고, 방관만 하던 그 사늘했던 달빛은 어머니의 곁으로 내려왔다. 반짝이는 빛 알갱이들 여럿이 내려와 쓰러진 어머니를 들어 올려 어디론가 데려가는지 사라졌다.

, 어떻게 된 거야? 어디로 가시는 거지?”

여전히 멍하던 삼형제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미궁에 빠졌다.

달빛이 데려갔을 것이다. 너희 어머니는...”

삼형제 주위로 영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내 손녀들 중 한명이었지. 그녀는 인간과 사랑에 빠져, 반대하던 우리 가족을 피해 그 인간, 너희 아버지와 이곳에서 보금자리를 만들었더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도깨비여신이었거늘, 힘을 모두 소진하고 저런 몰골이 되었다니 너무도 안타깝구나. 물론 너희들이 태어나 기쁘지만 이 할애비의 마음은...”

영감의 목소리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슬프기 그지없구나...”

고주망태 영감은 그녀를 누군가 달빛알갱이들로 어디론가 데려가 봉인시켰을 거라 했다. 아마도 달빛의 여신과 결혼한 고주망태의 아들 중 하나인 바다를 주관하는 도깨비 푸름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를 달빛이 데려간 것으로 보인다 했다.

 

아마, 그녀의 외삼촌 달의 토끼가 데려갔을 것이야! 그 빛 알갱이들은 그의 절구로 만든 것일 것이고.”

지금까지 듣고만 있던 준상 속, 청룡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청룡은 푸름이 잠들기 전 그의 호위무사 격으로 있었다. 청룡은 그때 푸름의 딸이 인간남자와 도망쳐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몰래 푸름에게만 보고했었다. 푸름은 딸의 선택을 존중하여 다른 가족들 그리고 당사자들도 모르게 뒤에서 그들을 지켜주었던 것이다. 그러다 어떤 불그스름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요괴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푸름은 잠들게 되고, 청룡역시 독도에 봉인되었던 것이다. 갑작스런 일이라 다른 사신들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못한 채.

다행인지, 그녀의 삼촌 달의 토끼도 그녀의 행방을 쭉 찾던 터였다. 그리고 때마침 그날 밤 그녀를 찾았기에, 달로 데려갔을 거야!”

 

준상은 청룡에게 들은 말을 형제들과 고주망태에게 전해주었다.

역시나 달의 토끼가 데려가셨군! 그나마 다행이구나! 한시름 놓았어. 그래도...”

과연 그럴까?”

고주망태 영감의 말에 청룡은 준상의 입을 통해 말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철저히 인간과 도깨비 모두를 좋아하지도 않고 실험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실험 광이었어. 그것이 가족으로 연결되었다고 다를까? 아마도 이들의 아버지도 사라진 것으로 보아, 둘 다 잡아다가 실험체로 쓰는 건 아닐지 모르겠군!”

분명, 바닷가에서 돌아가셨을 텐데...”

준서의 말에 청룡은 코웃음 쳤다.

아니지, 아니야, 그것은 바닷가 모래들로 만든 더미에 불과했을 거야. 그 시체가 쉽게 가루가 되었지 않았나? 하루도 안 되서 그런 상태가 되진 않지, 인간의 몸은...”

준서는 그제야 그때의 의문을 풀 수 있었다. ...!

 

영감이 엄지와 검지로 딱 소리를 내자, 삼형제는 다시 집 앞 영감 곁에 서게 되었다.

생각보다 쉽게 옛 기억들을 떠올렸구나.”

전에 어머니가 무의식에 찾아오셔서 말씀해주셨거든요, 막내와 찾아오라고요. 그럼 알게 될 거라고요.”

저도요!”

준서와 준상은 그 무의식 속의 어머니의 말을 말했다.

그랬었구나!”

저희 아버지는 어떻게 됐을까요?”

청룡 말을 들은 삼형제는 아버지가 걱정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아버지에 대한 어릴 적의 분노를 조금은 짓눌렀다. 그때 그들에게로 빛나는 무언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달빛알갱이들이었다. 그 알갱이들은 서로 교차하며 자그마한 원을 그리며 내려왔다. 지상으로 내려온 알갱이들은 회전운동을 계속하며 점차 모이더니 한 형체를 이루었다. 그 형체는 준상과 준서가 무의식속에서 보았던 그들 어머니의 형체였다.

잘 찾아왔구나! 얘들아! 할아버지도요, 죄송해요 할아버지.”

아니다, 아니야.”

사연이야 어찌됐든 삼형제와 울먹거리는 고주망태 영감은 반갑게 그녀를 반겨주었다. 한참을 그들은 가까이 서로 부둥켜안았다.

!

혜리야! 이 할매한테도 안겨보렴! 욘석아!”

할매 구미호도 나타나 모두를 감싸 안았다.

여보, 살살해, 살살, 숨 막힌다고!”

시끄러워요. 여봇!”

숨 막힌다니까! 이 할망구가 도깨비 죽는 꼴 보고 싶어?”

뭐라구욧? 그리고, 손녀딸 만나러 가는 거면 나랑 같이 와야 할 거 아녜욧?”

언제 울먹거렸냐는 듯 고주망태와 구미호는 서로 째려보며 싸워댔다.

여전하시네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오랜만에 조부모들의 예전과 같은 모습을 만나 혜리는 반가움에 울먹였다.

얘 혜리 너, 그렇게 울면서 웃으면 큰일 난단다. 엉덩이에 말이야! 한 가지만 하려 무나!”

오랜만에 보는 손주 애한테 거 무슨 경박한 소리야? 이놈의 할망구가.”

뭐 이 영감탱이가, 뭐래는 거야? 손녀딸 엉덩이 건강도 신경 써야지!”

영감과 할매의 만담 가까운 말씨름 덕에 가라앉을 뻔했던 분위기는 전의 행복했던 시절의 활력을 찾았다. 그 덕에 다들 웃을 수 있었다. 점점 헤어졌던 가족들이 조금씩 다시 모여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 같아 준상과 길동은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옆의 준서는 생각이 많은 듯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없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어머니, 어머니께 지금 들어야 할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아버지와 막내에 대해서요.”

그래, 이제 이야기해 줄게...”

아들 준서의 물음에 어머니 혜리는 눈물을 잠시 닦으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모두 그날 밤을 기억하지? 보름달이 뜨던 밤 말이야!”

삼형제와 영감, 할매는 그녀의 말을 숨죽여 듣기 시작했다.

 

17.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름의 가족

 

난 도깨비지만 전부터 인간과 어울려 살고 싶었다. 그래서 인간세계를 기웃거리다가 애들 아빠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인간깡패무리에 잡혀갈 위기의 나를 그이가 구해주었다. 물론 내 힘으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무리였지만, 그러기도 전에 웬 남자가 날 구해주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워 보였다. 물론 그는 얼마 안가 기절했지만 말이다. 마지막엔 내 힘을 써서 무리를 쫒아내고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그와 난 그날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곧 우리는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던 둘만의 결혼식을 하고 우리만의 아지트 숲을 만들어 가정을 이뤘다. 우리 집에서 반대가 심했기에 숲으로 숨어든 것이었다. 남편은 나만 보고 이 가정을 꾸리는 것에 동의해주었다. 그는 인근 마을 목공소를 다녔고 나도 주위 아낙네들에게 소일거리를 얻어가며 생활을 근근이 이어나갔다. 어찌된 일인지 점차 도깨비의 힘은 줄어들었지만, 이런 행복한 가정에 속해 있으니 문제될게 없었다. 계속될 것만 같았던 그와 나,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숲에 행복엔 끝이란 것이 있었나보다. 막내아이가 태어날 무렵이었다.

여보 이 아이도 분명, 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야! 난 너무 기뻐! 여보, 사랑해!”

남편은 막내를 품던 내 배를 쓰다듬으며 속삭이던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도망쳤던 가족들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릴 때도 많았지만 우리가족 생각에 살아갈 힘을 받았었다. 드디어 셋째가 세상에 나오며 우리에게 큰 행복을 주었다. 그러나 큰 근심거리도 안겨주는 존재로 태어났다. 몸이 햐앟고 한없이 약한, 허약한 아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둘에겐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된 것이 도깨비 힘을 소진시킨 것 때문인가 미안함 마음도 들었다.

도깨비신이시여! 하늘신이시여! 우리가족을 지켜주시옵소서! 우리 막내아이를 지켜주세요!”

우리는 아이의 이름을 별처럼 빛을 내라는 뜻으로 준성이라 지었다. 정성껏 아이를 돌봤고, 기도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 모습을 꿈꾸며 그렇게 키워나갔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준성의 몸이 또 불덩이가 되어갔다. 병원을 수십 차례 다녀 봐도 그 돌팔이들은 괜찮다고만 할뿐 답을 내놓지 못했다.

여보,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그래요, 엄마, 동생 금방 나을 거예요!”

나을 거예요!”

모두 두 손 모아 기도하며 셋째의 건강을 빌었다. 그러나 그 바람과는 달리 준성의 병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렇게 몇날 며칠을 씨름하다 잠들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주말 아침, 깨어보니 남편과 준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평온해야 할 주말 아침을 그렇게 초조하게 준서, 준상에게 아침을 챙겨주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남편이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 이리 나와 봐! 우리 준성이를 봐!”

한껏 상기된 목소리였다. 뭔 일인가 싶어 헐레벌떡 집 문 밖으로 나갔다. 밥을 먹던 준서와 준상이도 내 뒤를 따라왔다. 문을 열고 본 광경은 실로 놀라웠다. 열과 떨림으로 금방이라도 어떻게 될 것만 같던 준성은 모두 나은 듯 혈색이 돌며 생긋생긋 웃고 있던 게 아닌가?

! 세상에! 괜찮아 아들? 세상에! 여보! 어딜 갔다 왔어요, 애 데리고!”

준성에게 달려가 와락 안으며 물었다.

뭘 그리 급해! 나 배고파, 우리 막내 왕자님도 그렇고! 밥부터 먹자고! 다들 들어가자!”

모처럼의 걱정 없는 세상 행복한 식탁이었다. 남편은 밥을 먹으며 어떤 신선에게 다녀왔다고 했다. 우연히 만난 신선인데 아픈 준성의 이야기를 듣고 한번 찾아오라고 해서 아이를 데리고 다녀오는 길이라 했다. 모두 잠든 후 둘이서만 와야 한다 해서 몰래 다녀왔다고 했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아무리 물어봐도 비밀을 지켜야 한다며 말을 아꼈던 남편이었다.

, 어떠한가? 이렇게 아이의 건강만 찾았으면 된 거지!

뭔가 찝찝하고 신기했지만 신의 뜻이겠거니, 그렇게 또 행복은 이어지는가 싶었다.

 

주말이 지난 뒤, 남편은 목공소 일을 마치고 씩씩 대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목공소 사장이 자신에게 부당한 처사를 했다는 둥, 이 세상이 마음이 안 든다는 둥 취기 오른 주정을 하는 중이었다.

여보, 나 피곤하니까 먼저 잘게! 오늘은 설거지 못하겠다. 미안해!”

집에 와선 그 주정도 몇 마디 하지 않은 채 바로 곯아떨어졌다. 그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게 다가왔다. 우리가족 때문에 참으로 고생하는가 싶어서 미안했다.

내가 더 잘해야지! 미안해 여보!

그의 술 냄새로 가득한 퇴근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그 모습도 한없이 작고 소심한 주정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행동은 조금씩 과격해졌다. 식탁의 것들을 갑자기 팔로 쓸어버리는 것부터 화분들을 집어 던지며 고함을 지르는 것까지...

뭔가 그의 울분이 싸여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울분에 잡아먹힌 것만 같았다. 점점 더 그의 행동은 거세졌다. 그리고 그 타겟은 하나에 꽂혔다. 바로 준성에게. 준성은 건강을 되찾나보였지만 이내 다시 한쪽팔과 다리가 떨리며 창백한 얼굴을 되찾아갔다.

저 아이 때문이야, , 저 저 아이만 없었어도! 우린! 이렇게 되지 않았어!”

이 말을 끝으로 매일 그는 방바닥에 맥없이 뒹굴며 퇴근을 마쳤다. 공포에 맞서는 아이들이나 그 아이들을 다독여가며 감싸는 나도 점점 지쳐갔다.

괜찮아! 얘들아! 괜찮아! 아빠도 아파서 그런 거야! 아빠도...”

웃음 가득했던 그 집은 사라지고 고성과 울음만 있는 지옥일 뿐이었다.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달은 둥글고 커다란, 어딘지 막내아이의 얼굴처럼 창백하고 서늘한 빛을 내었다. 조금 있으면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라 아이들은 벌써부터 떨었다. 큰 아이 준서는 동생들을 다독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괜찮아! 얘들아! 괜찮을 거야! 아버지 이제 괜찮을 거야!”

본인도 다가올 공포에 몸이 떨려가면서도 동생들을 다독였다. 모두 데리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도 막막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남편과 산다고 반대를 피해 뛰쳐나온 집으로 갈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생각해보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후회도 된다. 어쨌건 또다시 창틈으로 남편이 퇴근하고 숲속에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술에 취해 비틀거렸다. 기분 탓인가, 남편 눈엔 뭔가 불그스름한 빛이 띄었다.

, 임마! 이 쌍노무새끼들! 이씨!”

그는 집 문을 열자마자 고래고래 소리쳤다. 술 냄새와 범벅되어 끈적끈적한 고함소리의 대부분은 상스러운 욕이었다. 남편은 눈에 보이는 것을 죄다 집어던지며 바닥에 후려갈겼고 집안 살림을 다 부수려 작정한 것 같았다. 그리고 막내에게 쌍심지를 켜며 다가갔다. 준서, 준상이 그를 막아섰지만 남편은 그들을 너무나도 손쉽게 밀쳐냈다.

어디서 아버지 가시는 길을 막아대, 이 어린노무새끼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술에 취한 남편은 힘이 장사였다. 계속 떨고 있는 준성에게 그는 다시 다가갔다.

여보, 이제 그만요! 제발! 저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래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

나는 남편의 다리를 있는 힘껏 붙들었다. 남편은 준성에게로 그 붉은 시선을 고정한 채, 잠시 멈춰졌었다.

준서, 준상아, 어서 막내 데리고 도망가! 어서...”

나는 얼마 남지 않은 힘으로 소리쳤다.

계속 뛰어! 멈추지 말고...”

준서는 막내를 안고 모두 도망쳤지만 내 힘은 거기까지였다. 곧 남편은 나를 뿌리치고 가방에서 왠 채찍을 꺼내 아이들을 쫒았다. 나도 그 뒤를 쫒으려 집 밖을 나섰지만, 난 맥없이...

그만요! 이제 그만하셔도 되요, 어머니! 무리하지마세요!”

 

듣고 있던 준서가 시뻘건 얼굴이 되어 가까스로 말을 이어가는 어머니를 안아주었다. 동생 준상도 그 뒤를 이었다. 길동은 저만치에서 조용히 고개 숙여 눈물을 훔칠 뿐이었다. 그의 몸은 또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얘야, 아가, 이리 온! 엄마한테 오렴!”

그러나 길동은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흐느낄 뿐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란다! 그러니 괜찮아!”

어머니 혜리는 막내아들 길동, 아니 준성에게 다가가 꼬옥 안아주었다.

다들 죄송해요. 저만 없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엄마한테 그런 소리하면 못써! 그저 상황이 그랬을 뿐이야. 그저 엄마가 미안해, 널 이렇게 불편하게 나아줘서...”

, ,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런 거 아니에요.”

준성은 어머니 품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동안 그렇게 울었다. 그러는 동안 준성의 떨리는 팔, 다리는 점차 다시 원래대로 잦아들었다.

이 못난 것! 어려워졌으면 바로 다같이 이 할배, 할매 곁으로 돌아올 것이지! 가족끼리 용서 못할 일이 뭐가 있다고! 이 사단이 뭐냔 말이다! 이 할애비가 너의 그 남편 나부랭이하나 용서 못하는 소인배인줄 아는 게야?”

옆에서 듣고만 있던 고주망태영감은 손녀딸의 모습에 울분을 토해냈다.

고작, 이런 꼴을 보여주려고! 고작!

자신의 품을 떠난 손녀딸이 미웠다. 아름답고 촉망받던 도깨비여신의 힘을 소진하고, 평범한, 아니 불행하고 나약한 인간으로서 풍파를 겪은 손녀가 미웠다. 손녀를 데려갔던 인간 남자에겐 분노도 치밀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장성한 사내들로 자란 증손자들이 그저 대견할 뿐이었다. 독도에 봉인된 아들 푸름도 모자라 그 손녀딸까지 잃을 뻔 했던 영감이었다. 이젠 화내기도 지친 고주망태 곁을 미호가 다독이듯 지탱해주었다.

 

18.출발

 

그때의 난, 너희 아버지의 폭주를 막을 길이 없었어. 맥없이 쓰러질 뿐이었지. 가족을 꾸리느라 내 고유한 힘이 소진되는 걸 방치한 결과였단다.”

혜리는 떨리는 양 손을 보며 말했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렇듯, 나도 가족 안에서의 희생을 당연시 하는 명분으로 내 고유한 힘의 고갈을 알고도 외면하고 말았어!”

떨리는 두 손을 마주잡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결국 그것이 너희들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결과가 되었구나!”

혜리의 목소리는 점점 더 침울해져갔다.

처음에 변해가는 너희 아버지를 보며 내 탓을 하기도 했어! 저 사람이 차라리 이 엄마를 만나지 않았다면 보다 평범하게 살지는 않을까 하는... 내 사나운 팔자가 그를 불행으로 끌고 간게 아닌가 싶...”

그런 소린 하지마세요!”

어머니 혜리의 말에 준서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그래요. 그런 자책은 하지마세요!”

, 요즘 세상에, 팔자니, 사주니, 그딴 건. 아니, 전에도, 앞으로도 그딴 얘기들은 다 말도 안 되는 것들이에요!”

준서를 이어 준상과 준성도 거들며 어머니 혜리에게 다가와 꽉 안았다.

어차피 그딴 건, 다 헛소리들이에요. 그딴 건...”

 

한동안 눈물 가득한 모자들의 상봉을 구미호와 고주망태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 무렵, 달에서 빛줄기 하나가 혜리에게 내려왔다.

이제, 시간이 되었어! 엄마는 이제 여기서 떠나야 해.”

빛줄기는 사라지더니, 혜리의 몸은 광채가 났지만 희미해져갔다. 삼형제와 영감 노부부는 놀라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얘들아, 이 엄마는 이미 이곳에 머무를 수가 없게 되었어! 하지만 너희 아버지는 저기 저 달 안에 갇혀있어! 아버지를 용서하고 구해주렴!”

혜리의 몸은 거의 투명에 가깝게 사라져갔다.

혜리야. 또 어딜 가는 게냐?”

어머니, 또 어딜 가세요?”

가족들의 물음에 혜리는 웃으며 대답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여기서 사라진다고 영영 만날 수 없는 건 아니에요! 나중에 저쪽 세상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던 혜리는 삼형제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도 너희들의 할 일을 해나가며 살고, 나중에 다시 만나자! 자기 자신을 좀 더 소중히 여기고 살아가렴. 우린 그러지 못했거든...”

혜리의 투명해진 몸은 공중으로 올라가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한지 한 장이 펄럭이며 준상이 팔에 안겼다.

? 이건? 또 그런 편진가?

 

한지를 받은 준상은 광화문 광장에서 얻은 한지가 생각났다. 그것처럼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할아버지, 저희 집으로 좀 데려다 주실 수 있어요? 저희 집에 있는 초로 글씨를 비쳐봐야겠어요!”

준상은 고주망태에게 물었다.

그럴 필요 없다!”

고주망태는 손가락에 도깨비불을 켜며 말했다.

이것으로 글씨는 비출 수 있을 것이야!”

과연, 도깨비불을 한지에 데어보니 글씨들이 펼쳐졌다.

너희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내왔구나!”

글씨가 나타난 한지는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혜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얘들아!

 

엄마가 꼭 해주어야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편지를 남긴다.

엄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

엄마는 이도라는 분의 도움으로 사후지만 편안한 곳으로 갈 수가 있게 되었단다!

홍길동으로 살아온 준성이라면 이도라는 분을 잘 알지? 그분께 너의 이야기도 들었단다.

 

전하께서 우릴 위해,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길동은 하늘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곳으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너희들이 찾아오면 해줄 말을 이곳에 남겨!

방금 너희들이 봤던 홀로그램은 정확한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야!

너희들의 아버지는 붉은 기운의 요괴에게 조종당했어.

우리 아버지 푸름까지 봉인시킨 존재야!

그런 요괴가 지금은 외삼촌인 달의 토끼까지 조종하며 달을 장악하고 있어!

너희들의 힘이라면 그 달의 토끼에 붙은 붉은 요괴를 처리할 수 있을 거야!

청룡백호의 힘을 얻은 소환사인 준상,

영실대감과 더불어 현무와 주작의 힘을 얻은 격투의 홍길동 준성,

그리고 황금호랑이를 얻은 약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준서!

너희들이라면 가족들을 그리고 달을 구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봉인된 상자까지도!

 

어머니가 우릴 계속 지켜보셨구나!”

길동은 계속 하늘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황금호랑이는 뭘 말하는 거지?”

준서는 의아해했다. 자신은 아버지에게서 올라탔던, 지금은 빠져나간 붉은 요괴의 힘 일부분과 저승사자의 힘 빼곤 아무런 힘이 없기에...

 

크흠, ...아아.. 아아!”

아직 떨어지지 않고 바람을 타고 있는 한지에서 또다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전하?”

길동은 이도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녹음 잘 되고 있는 건가?”

, 전하, 하시옵소서!”

어라? 대감님 목소리까지?

길동은 갑자기 흘러나온 이도와 영실대감의 목소리에 새삼 반갑게 느껴졌다.

듣거라! 삼형제여!”

이도는 어머니가 남긴 말 중에 황금호랑이에 관련해서 덧붙이듯 말을 남긴 듯 했다. 달과 민족이야기, 미래이야기, 오방신 중 황금호랑이와 봉인된 상자이야기 등 긴 내용이었다.

 

전하! 짧게 하시옵소서!”

뭐 인마? 지금 전할내용 엄청 많은데 무슨 소리하고 있어? 똑바로 데고 있어, 똑바로!”

하고 있사옵니다!”

자꾸 말대꾸하지 말거라! 까먹잖아!”

하시옵소서!”

중간에 영실대감과의 토닥거림으로 씩씩대는 이도의 모습도 상상할 수 있었다.

대감님이 또 고생하셨네!’

길동은 킥킥댔고, 덕분에 다들 우울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 어쨌든지 간에! 니들 어머니 말대로 달에 가려면 그대로면 안 된다! 준서의 황금호랑이의 힘을 얻어야 한다! 전에 무학대사란 분이 너희들의 시대의 서울의 호압사란 곳에 제압을 해두셨다 한다! 일단 그곳으로 가 보거라!”

그 말을 끝으로 메시지는 끝났고 공중의 그 한지는 불타 사라졌다.

 

삼형제에게 고주망태가 미호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왔다.

너희들이 갈 방향이 결정된 듯 하구나!”

영감은 삼형제 한명 한명에게 한마디씩 해주었다.

길동아, 아니 준성아! 너는 너의 존재에 대한 자부심을 더욱 가질 필요가 있다. 너는 충분히, 아니 없어선 안 되는 존재다 이미! 우리 가족들뿐만 아니라 민족 전체에게도 말이다!”

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준상이! 너도 더 이상 무신경한 태도는 아니 될 것이야! 민족 구성원들의 융합에 조금 더 힘써 주렴!”

알겠어요! 영감님, 아 아니 할아버지!”

준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준서야! 잠시 나쁜 마음을 먹고 폭주했었다 들었다! 이 할애비는 전부 이해한다! 얼마나 혼자 힘들고 억울했을고!”

!”

준서는 가만히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그래도 마음을 고쳐먹은 것! 훌륭하다! 과연 내 증손자야! 이젠 황금호랑이 힘을 얻고 동생들과 미래를 헤쳐가야 할 것이야!”

우리 준서는 잘할 거에요!”

그래요! 그렇겠지!”

준서 앞에서 고주망태와 미호는 말을 마쳤다.

 

좋아! 얘들아! 이제 갈 시간이다! 바로 출발하라!”

영감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람이 불어왔고, 새가 날아왔다. 전에 준상이 탔던 한지로 만든 새였다.

어서, 타라! 바로 출발해!”

삼형제는 망토를 두르고 한지 새 등에 올라탔다.

할아버지 할머니, 다녀올게요! 잘 쉬고 계세요!”

막내가 손을 흔들어 인사하며 소리쳤다. 새는 바람을 일으키며 호압사를 향해 날아올랐다.

저 장면은 익숙해지지 않네요. 여보, 우리 증손자들! 잘 하겠죠?”

당연한 소리! 또 믿어보자고! 매번 어린 손자들의 떠나는 뒷모습을 보는 건 서글프구려!”

그러게요, 우린 이제 너무 오래 살았나 봐요! 영감!”

암튼, 잘 헤쳐 갈 거야! 그 오형제처럼 저들도 똘똘 뭉쳤으니 말이야!”

지금쯤, 그 아이들도 잘하고 있겠죠?”

그럼! 말이라고!”

노부부는 삼형제의 날아가는 뒷모습을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그저 바라보며 서있었다.

 

19. 천상의 창덕궁

 

그나저나 이 녀석들,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말야!”

그러게요!”

삼형제를 배웅하는 노부부 뒤쪽...

그 하늘 멀리에 각기 다른 색의 불빛들 다섯이 나타나 반짝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영월의 어느 산자락에 이도가 서있다.

우애있게 지내라. 내 그리 일렀거늘... 수양이 이놈!”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마디를 뱉고서 한동안 돌탑 앞에 그저 서있을 뿐이었다. 돌탑 주위론 간단한 철망이 둘러쳐져 있고 망향탑이라고 명명해져 있었다.

이 땅 어디에도 내 손자 홍위는 없다더냐?”

!

이도의 물음에 어느 사내가 그의 그림자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전하! 그렇지만, 한 가지 다른 가능성은 효명세자께서 모시고 갔다는 소문도 있사옵니다!”

효명세자라... 그렇군! 어쨌든 그를 만나봐야겠군! 일단 그 하늘의 동궐도라는 것의 마지막 권을 마저 찾을 수밖에 없겠어!”

, 전하! 다시 출발하겠나이다!”

그래 우치야! 계속해서 수고 좀 해주시게나!”

, 그럼!”

!

보고를 마친 전우치는 다시 사라졌다.

우리 세손이 이곳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꼬! 이 할애비를 얼마나 원망했을꼬! 지 애비와 어미를 얼마나...”

이도는 긴 한숨을 쉬며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 어린 것이...”

전하! 이제 가실 시간이옵니다!”

그래, 가야지... 정내관, 가세나. 우리의 일을 마무리지어야지!”

산자락에 바람이 불어와 그들은 바람을 타듯 사라졌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의 망향탑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신의 시대로 돌아간 이도는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얼마 있지 않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생을 마감하기 전에 문종과 세조가 될 세자와 수양을 불러 모았다.

이 두 놈들이 결국 이 나라를 망치는 첫걸음을 걷게 되는구나!’

이도는 누워서 말없이 슬픈 표정을 한 세자와 수양을 바라보다 한마디 했다.

수양아, 형을 도와 이 나라와 조정을 위하는 삶을 살 거라! 그리고 세자또한 수양을 잘 챙겨주시게나! 둘이 우애있게 잘 지내야한다!”

죽음직전의 이도는 아들들에게 할 말은 산더미였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결국 그렇게 눈을 감았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전하!”

전하!”

곧이어 궁 안은 울음소리가 가득 차올랐고 그것은 도성 밖으로 퍼져나갔다.

 

흰 도포자락에 싸인 이도의 몸에서 둥그런 형광체가 빠져나왔다. 이도의 장례를 준비하는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볼 수가 없었다. 애초에 살아있는 사람 눈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 형광체는 궁을 두 세 바퀴 돌고나서 그가 어릴 적 살던 동네도 지나쳤다. 도성 위 하늘을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듯 몇 바퀴를 돌고 돌았다. 그것도 천천히 말이다. 구천에 떠도는 아주 미련이 많은 귀신처럼 말이다. 곧이어 그 형광체 주위로 먹구름이 몰려와 번개를 쳐댔다가 다시 맑은 햇빛아래에 흩어져 사라졌다. 그 형광체 앞에는 어느새 거북선의 용의 머리가 그 형광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순간의 정적이 흐른 후, 용의 머리는 그것을 삼키려 다가갔다. 그 형광체는 가소롭다는 듯이 이리저리 재빠르게 도망쳤다. 탱탱볼이 따로 없었다.

으휴 끝까지, 이도!”

한숨이 가득 섞인 한 외침이 울려 퍼지며 거북선은 그것을 쫓아다녔다. 몇날 며칠을 그렇게 꼬리잡기하듯 하다가 마침내 용의 머리는 그것을 삼킬 수 있었다. 그때는 왕의 승하로 흰옷을 입었던 사람들은 다시 원래의 옷으로 바꿔 입은 후였다. 다시 모여든 먹구름은 거북선을 어디론가 데려가 버렸다.

주상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지상은 새로운 임금에게 이제 막 기대의 천세 합창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앞날을 알지도 못한 채...

 

콰광쾅쾅!

거북선은 어느 공간에 나타났다. 여전히 여의주를 물 듯 형광체를 용의 머리에 문채로 말이다. 그 앞에 검은 용포를 입은 세자인 듯 보이는 자가 나타났다. 용의 입에 있던 형광체도 사라지더니 거북선 앞에서 사람의 형체를 드러냈다. 이도였다.

어서오십시요! 세종대왕 마마!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대왕은 무슨, 자네가 효명인가?”

, 마마!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둘은 몇 마디를 나누었다.

피이이잉!

거북선, 용의 머리에서 빛이 발산되어 둘을 감쌌다. 곧 두 손을 맞잡은 그들은 사라졌고 그 자리엔 거북선만이 남아있었다.

전하! 조심히 가시옵소서! 나중에 뵙겠사옵니다!”

거북선 안에 타고 있는 한사람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이도를 배웅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달로 삼형제를 데려다 줄 영실대감이었다. 그의 뒤에는 널다랗게 펼쳐진 하늘의 동궐도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제, 삼형제들에게 돌아가겠느냐?”

현무의 물음에 영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압사로 가겠느냐?”

아니요! 그곳은 이미 다녀간 후일 겁니다. 전의 그 빌딩 위로 가주세요!”

동궐도는 점차 접혀졌고 영실의 말에 거북선은 지체 없이 다시 번개를 맞고 사라졌다. 곧 그 빌딩 위로 가서 삼형제를 태웠다.

, 추워! 왜 하필 이런 추운 곳에서!”

길동이 투덜거렸다. 임금을 배웅한 뒤라 그런지 그런 길동의 투덜거림도 마냥 싫진 않고 왠지 정감 있게 받아들인 영실대감이었다.

이 양반, 웬일로 딴지를 안거실까?”

길동은 그런 영감의 태도가 평소와 달라 그저 의아했다. 그 옆의 형제들이나 길동은 전과는 약간 다른 힘을 갖춘 듯 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들의 눈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 이제 저 위의 달로 가면 되겠지?”

현무는 삼형제와 영실에게 물었고 곧 하늘 위로 솟아 빠르게 올랐다.

으아악! 현무님! 천천히요, 천천히 좀 가요!”

재빠르게 앉아서 준비한 형제들과 영실과는 다르게 막내 준성은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거북선의 현무는 아랑곳 않고 달의 빛과 어둠의 경계로 날아갔다.

 

그렇게 난 효명과 이곳 하늘의 창덕궁으로 왔지만 우리 홍위는 볼 수가 없었지. 그리고 자네들이 속한 제국익문사를 기반으로 지금의 레코더즈란 단체를 만든 것이야! 그리고, 그래, 지금쯤 달로 가고 있을 거야! 그 형제들은...”

졸린 눈을 주체할 줄 모르는 보명이 안쓰러워 이도는 이쯤에서 마무리했다.

제국익문사는 레코더즈의 시작과 삼형제의 근황을 기록하고자 했다. 이 자리는 보명이 그것을 위해 이도를 인터뷰하는 자리였다.

, 전하!”

이도의 긴 이야기는 마침내 일단락 지어졌다. 덕분에 보명의 반쯤 감긴 눈은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긴 시간동안 긴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하옵니다. 호압사의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다시 질문 드리러 오겠사옵니다!”

인터뷰 짧게 끝내고 기록 후에 준상을 기다리며 조금 쉴까 생각했던 보명의 생각은 무참히 깨져버렸다. 준상이 올 때까지 정리할 내용이 산더미였기 때문이었다.

물러가겠사옵니다!”

이도가 또 이야기꺼리들을 생각하는 듯 해 보명은 서둘러 장비를 챙겨 자리를 빠져나갔다.

참나, 할 얘기가 아직도 수천개구만! 예나 지금이나 어린놈들은 쯧쯧쯧, 문제구만! 문제야!”

투덜대는 이도의 머리 위로 학 한 마리가 여유로운 날개 짓으로 지나쳐갔다.

 

20.에필로그1.임금님의 인터뷰

 

본 이야기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 다른, 허구의 이야기임을 밝힙니다.

 

허구?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 허구래? 거 해설자대감, 자네가 역사를 아는가? 아냔 말이다! 이런, 기껏 책 쪼가리 몇 개 읽고서는 무슨 놈의, 그리고 거 요새 배운 것들조차 한자를 잘 모른다지? 영언가 뭔가 하는 서양 놈들 말이 이 시대를 지배한다지?”

왜 이러세요? 임금님 채신머리없게요~! 그리고, 대감은 무슨 대감이에요?”

뭐 인마? 니들이 언제, 나 제대로 된 임금대우 잘 해줬다고 그래? 흥이다 이것아!”

아휴~ , 기사 빨리 써야 되요! 마감 얼마 안 남았다고요! 빨리 인터뷰 좀 땁시다. ?”

, , 땁시다? 땁시다? 거 옹주라는 것이 기자행색이나 하고 말이야! 자고로 왕족이란 고귀하게 있어야하거늘! 땁시다는 또 뭔가? 땁시다가!”

, ! 시작합시다! ! 것 참 말 더럽게 많으시네! 고귀하기는 개뿔, 우리아부지가 누굴 닮았나했더니, ~. 역시 임금감은 양녕 오라버니셨는데, 저런 욕쟁이 수다꾼이 왕이 되다니!”

, 너 뭐라 그랬냐? 이래 뵈도 말이야. ? 내가 네놈 조상님인데, 어따 대구 어? 어쩌구저째? 그리고, 누가 네 오라버니야? 한참 후손 놈이 어디 근방지게 우리형님한테! 그리고, 나 없었으면 너도 없거든? 이거 왜이래?”

~ 그러셔요? 엄청 고맙네요. 조상님! 으이그...”

어휴, 이게 확 그냥~ , 욕한바가지 해줘도 모자를 것 같으니라고! 저게 내 후손? 어림없는 소리! 뭔가 잘못된 게야. 우리집안 미래가 이렇게 암울할 순 없어! ! 그럴 리 없지!”

제발요! 으이그, 그러길 제가 더 바라고 있거든요? 누군 좋아서 그쪽 후손하는 줄 아나? 있다면 누가 내 출생의 비밀 좀 제대로 밝혀주소!”

뭐 인마? 그만 못해?”

먼저 그만 하시죠?”

 

에고고 둘 다 그만 좀 해라. 어쨌든 기자와 남자의 다소 사적이고 가족적인 대화가 그렇게 지나가고 카메라가 켜지며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그 곳엔 예쁘장하게 생긴 기자와 근육질 몸매를 감추는 용포를 입은 남자가 서로 마주보며 의자에 앉아있다.

? 예쁘장하게? 예쁘장하게 생겨? 해설자양반,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가?”

, , 해설 좀 하자! 그냥 넘어가 이 임금님아! 너도 없는 근육, 있는데 감췄다고 해줬잖아! 고기만 많이 먹으면 다야? 꼴에 임금이라고 황제다이어트 하니? 근데 왜 그래 몸이? 으이그, 고마운 줄 알아야지! 헛기침을 한번 내뱉은 임금의 입이 잠시 댓 발 나왔다가 도로 들어갔다. 어쨌든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제국익문사에서 나온 이보명 기자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령관전하!”

방금 전과 달리 기자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 그래요. 이렇게 후손을 만나게 되어 짐 또한 기쁘기 그지없소이다!”

남자도 격식을 차리며 대답했다. 인터뷰는 기자의 바람과는 다르게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건 그렇고, 왜 그들인 거죠? 보낼 사람이야 많았을 텐데요. 길동은 그렇다 치고 왜 하필 한창 과학연구에 몰입해야 할 영실대감이 그 조합에 들어간 거죠?”

임금이 바로 대답했다.

, 그거야, 중단된 것이 아닐세. 과학연구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지. 그리고 영실대감 그자는 본래 이곳 사람이 아니야. 내가 세자시절, 저 멀리 머나먼 곳에서 그의 아버지와 넘어왔지. 불행히도 노예 신분으로 말이야!”

임금은 마치 옛 친구의 모습을 그리워하듯 멀리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 그것도 나중에 따로 다시 말하는 것이 나을 듯하네. 어쨌든 그때의 영실대감 연구는 마무리가 되었었네. 그리고 무엇보다 더 넓은 세계를 다니고 싶어 하는 그 열망을 차마 짓밟지는 못했네. 그리고 워낙 그때 명의 압박과 사대부라고 칭하는 그 명국 빠돌이 중신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거든. 그대로 있다간 그 목숨이 촛불위의 파리 목숨보다 못한 처지가 될 게 뻔했지.”

중신들 생각에 열이 받았는지 임금은 인상을 팍 썼다.

 

끝으로, 그 삼형제의 근황에 대해서 여쭤보겠습니다.”

피곤함에 흘러내리는 다크써클로 세수라도 했을법한 안색이 된 기자는 고통스럽게 질문했다.

벌써 마지막인가? 허허, 아쉽게 되었구먼! 그래 질문하시게~!”

지쳐버린 기자완 다르게 맞은편의 임금이란 자는 아쉬운 표정으로 대답할 준비를 했다. 그것도 길고 긴 대답을 위해서 말이다.

지금 그 삼형제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요?”

그들은 아직, 그들의 시간 속에서 머물고 있다네! 해결할 것도 있고 말이지! 그것들이 해결되면 본격적인 우리의 궤도 안으로 들어올 것이네! 장길산, 임꺽정처럼 그리고 전에 전우치가 했던 것처럼 말일세! 그나저나 이렇게, 시간을 벌수 있는 것도 과인의 장인어르신께서 친히 시간 관리자가 되어주셔서 이 모든 게 가능하게 되었지. 어르신껜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네!”

임금은 잠시 말을 멈추고 먼 산이라도 바라보듯 천장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들은 아마, 지금쯤이면 달에 가있을 걸세. 그 전에 그들 삶의 응어리들을 푸는 것도 실행했을 것이고!”

달이요? 응어리요?”

임금의 말에 보명은 물었다.

뭘 묻나? 그들이 갖고 있던 응어리란 건 자네도 봤으니 잘 알지 않는가? 그들이 어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떤 응어리가 있는지도 말일세!”

임금은 되물었다.

, 그렇죠. 유년시절부터 이유를 모르는 폭행으로 그들은 망가졌었죠. 어쨌든 그건 그렇고, 달은 무슨 말씀이시죠?”

보명은 계속해서 펜을 굴려가며 물었다.

그들의 어머니 혜리가 천상의 창덕궁으로 가기 전, 메시지를 하나 남겼지. 그들은 그것을 확인하러 가는 것이야!”

임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고, 보명도 그 옆에 다가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잠시 인터뷰는 접고 밤하늘에 비치는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21. 에필로그2. 레코더즈의 시작

 

R. e. c. o. r. d :기록하다. 적어 놓다. 기록에 남기다. 기록. 경력. 신원...

R. e. c. o. r. d. e. r : 녹음기, 녹화기, 리코더,

(프랑스어) 끈을 다시 엮다...

끈을 다시 엮다. 끈을 다시 엮다!

이것은 민족의 끈을 다시 엮어가는 자들의 이야기다!

 

! !

[레코딩을 시작합니다.]

둥그런 1인 비행선 안에 타고 있는 한 남자가 카메라 녹화버튼을 누르며 멘트를 시작했다.

 

지구 수면위의 얼마 남지 않은 땅. 그런데 저것들을 땅이라 할 수 있을까? 마치 돛을 잃은 배처럼, 그저 바다 위에 떠있는 얇디얇은 합판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난민선마냥 사람인지 시체인지 모를 이들을 태운 채 그저 떠돌고 있다. 그 바다는 썩어 검게 물들여진지 꽤 오래인 듯하다. 땅의 규모는 제일 커봤자 한반도의 반에 반도 안 되는 크기! 그 안의 몇 개 되지 않는 눈동자들은 쓰러진 몸뚱이에서 그저 하늘만을 주시할 뿐이다. 눈 밑에 벌어진 입들은 하나같이 다물 생각을 못한다. 그들이 보는 것은 무엇일까? 앵앵앵~! 하늘엔 벌떼무리 같은 것들이 시끄럽게 소음을 내며 이리저리 휘젓고 다닌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드론이다. 그것들은 계속해서 물에 잠긴 대륙 속에 있던 물건들을 하늘 위 우주로 운반해간다. 그저, 섬들에 낙오된 그 눈동자들의 주인들은 버려진 짐짝마냥 항해하는 합판위에 널브러져있다. 팔 하나 뻗을, 소리칠 힘도, 힘이란 힘들은 다 빠져나간 듯 보인다. 정녕, 이들에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언제쯤 흘렀던 눈물인가? 눈물자국들인지 오염물질들인지, 덕지덕지 지저분한 얼굴의 그들은 그저 시체처럼 쌓여 누워만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황폐해진 지구인가? 우주로 나가서 그 모습을 보자! 지구는 심하게 부서져 썩은 사과처럼 우주공간에 나뒹굴고 있다. 달이라는 화살촉에 심장을 얻어맞아 부서진 지구는 참담, 그자체이다. 부서진 틈으로 금방이라도 용암이라는 지구의 피가 솟구칠 기회만 바라보고 있는 듯 보인다. 부서진 지구 주위엔 썩은 사과에 날파리가 끼듯 수많은 우주선과 지상으로부터 짐을 옮기는 드론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드론이 어느 정도 물건들을 옮겨와 싣고 나면 우주선은 게이트를 열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하나씩, 하나씩,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지금은 지구수탈시대라도 되는 것인가? 계속해서 수많은 드론무리가 우주선들에 짐들을 실어 나르고, 여러 게이트들도 계속해서 열리고 닫히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우주선들은 전부 사라졌고 휑한 지구만이 우주쓰레기들로 둘러싸여 힘겹게 돌고 있을 뿐이다. 그 마저도 점점 힘이 딸려가고 있다. 지구에 양분을 주던 붉은 결을 뽐내던 태양도 이젠 백발만이 무성하며 꿈틀댄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보이는가? 우리의 미래가? 정녕, 이런 모습이란 말인가? 우리들이 만들어낸 미래란 놈의 모습은?

 

[레코딩을 종료합니다.]

띠로릿!

영상을 찍던 남자는 카메라를 끄며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환경 다큐멘터리로는 아주 더할 나위 없겠어! 근데 도대체, 이게...”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대체... ,”

꽈광!

그 순간 남자는 흔들리는 비행선 모서리에 부딪혔다.

으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그의 비행선은 열려진 게이트 속으로 어떤 우주선 하나와 빨려 들어갔다. 게이트는 화면에 담긴 게이트들과는 조금은 달랐다.

 

한편, 남자가 지구의 참담함을 담아낼 동안 우주 쓰레기들 밖에서 낡은 우주선하나가 아까부터 지구를 바라보듯 우주공간에 있었다. 오래전 황금빛을 뽐냈을 법한 빛바랜 누런 거북선의 모습이었다. 안에는 화려한 한복차림의 젊은 두 사내가 있었고 정장차림의 백발이 무성한 한 노인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란 말이더냐?”

한복을 화려하게 입고 조선시대 양반들이 쓸 법한 갓을 쓴 젊은 남자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에게 물었다. 그 사내들은 노인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본인은 존댓말로 대답했다.

! 선조님들께서, 그리고 저희 세대를 거쳐, 후손들까지 오랫동안 살아가던 지구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노인은 버튼하나를 누르며 말했다.

더 이상 이곳은 위험하오니 이제 이동하겠사옵니다!”

거북선 앞의 머리 부분에서 빛을 뿜으며 게이트를 만들어냈다.

보실 것은 다 보셨으니, 자세한 것은 이제 안전한 시대로 모셔서 말씀드리겠나이다!”

거북선은 게이트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게이트들이 사라지고, 늙은 태양 곁의 망가진 지구는 계속해서 우주쓰레기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썩어갔다.

 

콰광쾅쾅!

어느 봄 햇살이 가득한 깊은 산속에 번개를 일으키며 빛바랜 거북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평한 곳에 노인은 배를 세웠고 셋은 밖으로 나갔다.

역시 이런 곳이 사람 살 곳 이지요 형님!”

사내들 중 동생이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이제 말해보게나! 그것이 어찌된 것이야?”

사내 중 형이 노인에게 물었다.

! 말씀드리죠! 그것은 미래의 모습이 맞사옵니다! 외계세력의 습격으로 지구는 한순간에 그 사단이...”

아까 본 그 우주선들이 외계부대란 말인가?”

사내는 계속해서 물었다.

그들은 지구인이 탄 우주선이온데, 그 모습들은 피난을 가는 것이옵니다!”

,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의 미래나 꽁무니 빼는 것들은 아주 판박이구만 그래!”

사내는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차댔다.

, 어쨌든 그 일을 상의 드리고자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콰광쾅쾅!

으아아악!

노인이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을 때 하늘에서 또 번쩍하더니 작은 비행선 하나가 그들 옆으로 추락했다.

저건 또 뭐야!”

셋은 당황해하며 그쪽으로 일단 가보았다.

콜록콜록!

어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까 영상을 찍던 남자였다. 셋을 태운 거북선이 게이트를 탈 때 같이 빨려 들어온 것이었다.

쌔애애앵!

당황해하는 남자의 목에 사늘한 검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자넨 누구인가?”

제 이름은 자 장, 장 성휘입니다. , 이름이요. 이름...”

누가 보낸 것이냐고!”

남자는 부들부들 떨며 이름만을 간신히 말했지만 결국 밧줄로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사 살려 주세요! 저 그냥, 그냥...”

으악!

사내들은 남자를 칼집으로 간단히 제압해 기절시켜 묶곤 노인에게 질문을 계속했다.

재황! 마저 이야기해 보거라! 상의할 것이 무엇이냐?”

두 사내 중, 성질 급한 형이란 사내가 다시 물었다.

, 그것은...”

노인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노인이 사내들에게 설명하는 미래는 이렇다. 미래 어느 시점에 외계문명의 습격으로 지구는 폐허가 된다. 지구의 생명체들은 거의 그 생명력을 잃게 된다. 또한 외계문명 그들이 싸지르는 폐기물들은 지구를 피폐시키고, 침략 중에 달까지 지구로 던져버려 파괴시킨다. 반면 지구의 최고등생물 인간들은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물론 화합을 이룬 인종이나 민족들도 있지만 그들만으로 적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그리고 일행들이 본 우주선들의 정체는 인간 중에서도 돈 많은 권력자들이 미리 알아놓은 차기의 지구행성을 향해 떠난 것이다. 불행히도 한반도에 살던 한국인 대부분은 썩어가는 지구 속에서 시체처럼 누워 종말을 기다리는 존재들 중 하나이다. 한민족은 오래 전부터 단군의 삼형제의 힘이 전승되어왔다. 그것이 형제 자매의 형태로든, 친구간의 형태로든 그 형태는 다양했지만 그 힘은 대등했다. 단군의 삼형제로부터 시작된 삼형제의 힘이 어느 순간부터 발현되지 않게 되면서 민족 전체의 힘을 잃게 된다.

 

이 같은 미래를 알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미 저의 세대에서 조선이란 나라는 문을 닫았지만 후손들은 남아있기에...”

노인의 말은 침울 그 자체였다.

제가 퇴위 당하던 날, 제국익문사는 그 시대에서 모습을 감추고 여러 선조들을 찾아뵈었습니다. 조선의 효명세자와 영, 정조, 성종 선왕님들, 그리고 삼국시대와 신라, 고려시대, 옛 고조선시대까지...

안타깝게도 그들은 저희들의 이야기를 믿어주시지 않으셨죠! 그래서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대군마마와 세자저하께 접촉을 한 것이옵니다! 마마님들도 단군의 삼형제의 정신을 이어받으신 분들이기에!”

 

이보게, 충녕! 생각해보았는가?”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저하!”

노인은 잠시 거북선 정비를 하러가고 사내 둘이 언덕에 올라섰다.

이 형이 전부터 말해온 것 말일세!”

저하! 그때 그 말씀이시오면, 마시옵소서!”

난 이곳에 오고 다시금 깨달았네! 임금이란 자리 말일세! 나보다는 자네에게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어!”

형님! 부디 이 못난 동생에게 미루지 마시옵소서, 저하!”

아니야, 아니야 이미 불가로 떠난 효령이나 이 형은, 나 나름대로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어! 자네가 임금자리에서 자네 할 일이 있는 것처럼 말이야!”

저하!”

다시 말해두지만, 난 역사 밖에서 따로 내 할 일을 할 것이니, 아우님도 조선의 문을 활짝 열 임금으로서 왕실이 아닌 민족을 위해 힘을 써줘야 할 것일세! 그것은 나보다는 자네가 제격이란 말일세! 아시겠는가?”

형의 말에 동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물을 훔쳤다.

어쨌든, 완고하신 아바마마껜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자넨 마음의 준비나 하고 있게나!”

형이란 사내는 그 한마디 남기고 먼저 언덕을 내려가 버렸다.

 

돌아가실 준비가 다 되었사옵니다!”

노인은 사람크기만한 게이트 하나를 열며 말했다.

고맙네! 자네 덕분에 나아갈 길을 알게 되었어! 또 보자고!”

형이란 자가 노인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저 묶여있는 자는 어찌 하오리까?”

노인은 묶인 사내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참, 그러네 그려! 일단 우리가 데려가겠네! 또 보세나!”

형제 둘은 묶인 남자를 데리고 조선초기로 되돌아갔다. 돌아가던 중 그 게이트의 왜곡이 발생해 장성휘란 사내는 고려 말 위화도 회군이 있던 시절로, 두 형제도 원래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로 빠지게 되는데...

 

이 두 사내들에게 설명을 열심히 해준 노인은 레코더즈의 전신격인 대한제국 제국익문사의 창시자, 조선의 마지막 국왕, 고종! 이재황!

 

이 두 사내 중 성질머리 급하고 화끈한 성격의 형은 조선의 첫 번째 폐 세자! 양녕대군, 이제!

 

고기와 독서, 수다, 욕을 좋아하지만 큰형 앞에서는 내색 못하는 훗날의 세종! 충녕대군, 이도!

 

그리고, 우연히 그들에게 엮여 조선시대의 기생과 사랑에 빠지게 된, 훗날 장영실의 아버지, 정체불명의 장성휘!

 

어허, 이사람, 수다라니! 난 단지 음운학에 관심이 있는 게야, 해설자양반!”

왜 또 나오셨어? 1권 끝나가니까 그만 들어가쇼. 이 이도 임금님아!

어허! 그래도 이놈이! 어찌, 하늘같은 임금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는 게야!”

이 대표! 하늘은 무슨, 그놈의 이름, 이미 알 사람은 다 알아요. 그만 들어가쇼!

, 해설하기 힘들다! 뭔 말들이 그렇게 많아 다들? 수다의 민족이야 뭐야?

 

어쨌든, 누가 알았겠는가? 이들의 만남과 왕래들이 민족과 지구전체를 살릴 레코더즈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을...